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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검에 찔린 상처원고글/영혼의 동반 2010. 8. 12. 20:41
창검에 찔린 상처
제 몸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많이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아주 작은 것이 있는가 하면 오른쪽의 등에서 시작하여 옆구리까지 내려온 길고 깊은 수술 자국도 있습니다. 오른쪽 무릎의 검붉은 흉터는 얼마 전 사다리에서 떨어졌을 때 생긴 것인데, 땅에 떨어져 뒹굴면서 신음하던 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몸에 흉터 하나 없이 곱게 자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십 년을 살면서 한 번도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마음의 상처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고 있는가를 통해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을 이런 상처와 흉터들을 꺼내어 세어 본다면 몸의 흉터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감정과 정서와 관련되어 있고 아주 예민한 부분이어서 밖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상처가 깊은 것이라면 신체적인 성장과 인격의 형성 더 나아가 기도생활에까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성장과 성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지식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과 상처받은 사람을 도와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기도생활에 약간의 도움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의 일상생활은 뒤죽박죽으로 되어버립니다. 감정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고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길고 긴 고통과 어둠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감과 자긍심의 결여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부정적이기 쉽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깊은 상처가 그 사람을 고통스럽고 길고 긴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제 각각이듯이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대하는 태도 또한 저마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을 자신과 떼어놓고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고요하게 머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어떤 ‘틈’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될지 모르겠습니다. 요나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요나 4, 5).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도 요나처럼 일단 멈추어 서서 숨을 돌리고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과 거리를 두고 보려는 끈질긴 노력으로 어떤 ‘틈’이 생기고 그 사이를 헤집고 하느님의 숨결과 생명의 물이 흘러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괴로운 시간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과 멀고 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대신해 주면서
치유된 몸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는 하나의 흔적으로 남겠지만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가시처럼 우리를 괴롭힙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과 편안하게 지낼 수 없고 더 나아가 주님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과 촌장’은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오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다”라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누구인들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고통 속에 있을 뿐이고 자기 자신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굴레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위해 바알의 예언자들과 죽음을 건 싸움을 했지만 바로 이것 때문에 죽을 위험에 떨어진 엘리야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왜 그런 처지에 떨어지게 되었는지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죽음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 열왕 19, 4)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똑같은 말로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런 엘리야의 상태를 성경에서는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지나갔으며, 산을 뒤흔드는 지신과 불길이 지나갔다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은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대하듯이 해 주어야 하고, 예수님의 역할을 대신 해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의 똑같은 말을 잘 들어주셨던 것처럼 그가 하는 말을 인내를 가지고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면서 그가 겪고 있는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자비가 회복되고, 스스로 일어나 자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상처 안에서
산다는 것이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고통을 받으시고 상처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매일 당하고 있는 고통 안에 함께 계시며 절망과 어둠 속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외로움 가운데 함께 하시고, 우리의 깊고 깊은 상처 한가운데서 그 상처를 싸매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께서 지극히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통의 바다’로 뛰어들어 오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오상(五常)뿐 아니라 벌집처럼 수없이 많은 상처를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예견하며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다”(이사 53, 2-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이 상처들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치유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런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겠습니까?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이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셨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셨다”(이사 53, 5)라고 말합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상처 받으신 예수님의 상처로 우리의 병이 치유되며 그분의 상처로부터 생명의 물이 흘러나와 우리를 새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옆구리를 찔린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상처가 났기 전에는 창검으로 찔린 그분의 상처가 결코 아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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