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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원고글/영혼의 동반 2010. 8. 12. 20:48
봄이 시작되고 있었던 어느 날입니다. 어떤 신부님을 뵐 일이 시내에 나갔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수도원 뜰을 걷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제가 들어오고 나서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왠 꼬마가 정원 한 켠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예쁘기도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 아이 옆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뭐하고 있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지금 뭐하고 있는데?”라고 다시 묻자,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좋은 일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무슨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잔디에 가려있는 작은 보라색 꽃을 가리키며 "좋은 일, 꽃!"이라고 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꽃을 보고 있는 것이 ‘좋은 일’이라니.
몇 일이 지났습니다. 거의 10 년 동안 만나지도 못했고 전화통화도 못했던 어떤 신부님과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서로 안부를 묻고 났을 때, 신부님께서 저에게 “무슨 일 하고 있어요?”라고 물으셨습니다. 몇 일 전의 꼬마가 생각났습니다. 장난삼아 “좋은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이라고?” 다시 물었지만 “좋은 일”이라고만 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에이, 장난하지 말고...”라고 말씀하시기에 제가 수도원에서 하고 있는 ‘좋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왜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 꼬마가 생명으로 가득 찬 꽃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며, 제가 하고 있는 일 또한 생명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관계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일이건,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며 거룩한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돌보기 위해 오셨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3; 14)라는 말씀이 이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영이 서려있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돌본다는 것은 주님을 돌본다는 것이고,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주님을 경배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주님의 형상을 일그러뜨리는 일이며, 생명을 파괴하는 일은 주님의 몸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에서는 생명을 돌보는 것보다 파괴하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잘려나간 산의 허리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흉칙한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강둑이 말끔하게 단장되고 바닥이 파헤쳐지면서 펄떡거리는 생명, 물고기들이 쫒겨나 갈 곳을 잃고 있습니다. 생태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서도 생명과 사람에 대한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습니다. 이런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한 폭력과 거대 폭력을 이야기하면서 토마스 머튼은 ‘뼈가 부러진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전 역사를 통해서, 믿는 이들과 성인들 사이에서까지도 그리스도는 사지를 잃는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물리적 육신은 빌라도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은 세기를 두고, 이기적이고 죄로 기우는 분열의 고통 속에서 사지를 찢기고 있습니다. 서로의 일치를 파괴하는 상처는 사이를 벌려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스도는 팔다리가 찢기고 사람들 안에서 살해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이 폭력과 생명의 파괴 모두가 그들 나름의 이유와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얼마나 빈약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어린이들은 금방 알아차립니다. 생 떽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어른들에게 하는 불평은, 어른들은 자기(어린왕자)에게 새로 사귄 친구가 생겼을 때, 그 아이의 목소리가 어떤지, 그 아이가 무슨 경기를 좋아하는지 등의 질문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그 아이가 몇 살인지, 몸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형제가 몇 명 있는지, 그 애 아버지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 등에서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숫자들을 가지고 자기가 사귄 새 친구에 대해서 모든 알았다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어른들에게 ‘창턱에는 제라늄이 자라고, 지방에는 비둘기들이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에 대해 조금도 상상해 내지 못할 것이다. 대신 ‘2만 달러나 나가는 집을 보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야, 정말 좋은 집이구나!’라고 말한다”라고 투덜거립니다. 삶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성이 돈과 숫자로만 헤아려지는 지금과 같은 각박한 시대 살고 있는 어른들에게 ‘한 방 먹인’ 이야기입니다.
어른들의 이런 논리로부터 교회가 세상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말들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해서 우려하고 반대하는 것은 그 일의 옳고 그름과 관계되는 것 이상입니다. 이것을 훨씬 뛰어넘는 생명이신 주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에도 세상의 논리와 방법으로서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고 그분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이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한 사람이 다가와 베드로 사도에게 자선을 청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람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 6). 그러자 그 사람을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고, 껑충껑충 뛰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생명을 주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회복시켜주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돈과 힘과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않은 가난한 마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살려냅니다. 이 말은 생명에 대한 열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자기희생과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해야 할 것입니다. 화려하고 거대하며 남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에서부터가 아니라 너무 작아 눈에 띠지 않고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것을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나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꼬마 가 꽃을 보고 있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주님을 대하듯이 대하고 돌보고 존중하고 경배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할 때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일을 하라고 불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1요한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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