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원고글/영혼의 동반 2010. 2. 24. 21:07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조용필 씨의 노래를 아주 좋아합니다. 어떤 노래는 부르는 것 보다 노랫말이 더 좋은데, 이런 노래는 노랫말을 복사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어느 수녀원에서 양성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조용필 씨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젊은 수녀님들께 “용필이 오빠 노래 들려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다시 “용필이 오빠 아세요? 그분 노래 좋아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니임... 용필이 오빠가 아니라 삼촌이죠!”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준비했던 디브이디가 조용필 씨의 가수 생활 40년 기념 콘서트를 녹화한 것이었습니다. 이 디브이디의 첫 장면은 에니메이션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예쁜 꽃이 피어있고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는 초원에 몇 마리의 표범과 하이에나가 놀고 있었습니다. 한 표범이 멀리 봉우리가 눈으로 덮혀있는 높은 산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옆에 있는 다른 표범과 함께 그 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크고 작은 산들을 지나 가파르고 점점 험해져가는 산을 만나자 표범 중의 한 마리는 달리는 것을 그만둡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홀로 남은 표범 앞에 아주 넓고 깊은 계곡이 나타났고, 그 건너편에 자기가 바라보고 달려왔던 봉우리가 그대로 있습니다. 표범은 주저하다가 돌아섭니다. 그러다가 되돌아서서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하고 계곡 위로 자신의 몸을 던지지만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계곡으로 추락해 버립니다. 계곡에 떨어진 표범은 그런 상태에 한동안 머무르다가 다시 죽을 힘을 다해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그 산의 정상에 섭니다.
이 동영상이 우리 신앙생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 걸어야 하는 과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사실, 많은 영성가들이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산에 오르는 것으로 비유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틀린 말도 아닐 것입니다.
저 너머를 바라보며
하느님을 찾는 여정은 그분을 향한 그리움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 하늘이나 바다 혹은 첩첩이 쌓인 산들을 바라보며 저 너머에 누가 살고 있을까, 무엇이 있을까 등의 생각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밖에 없는 마을에서 태어난 저 또한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며 자랐습니다. 가보지 않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은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은 씨가 “시는 열일곱 살 때부터 나의 북극성이었다. 시는 나에게 길을 걸어가는 자이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왔던 북극성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떠오르고 그 중에는 그리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던 때에도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고, 하느님을 더 깊이 믿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지금도 날마다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그리움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순간부터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싶어 하고 그분을 보고 싶어 하며 떠나는 여정과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또한 이 그리움에 그분의 목소리가 닿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움은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주실 분에 대한 애정어린 갈망이기에,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만들어낸 헛된 망상과 욕망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함께 하는 시간과 여유를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말처럼 그분을 향한 강한 사랑의 표현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곡을 건너 뛰며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떠난 여정 안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이런 삶에 대해 교회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사목헌장 1)라고 말합니다. 기쁨과 희망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쉽게 감사드리며, 하느님을 믿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런 일처럼 생각됩니다. 문제는 장애물을 만나고 건너 뛸 수 없을 것 같은 넓고 깊은 심연 앞에 섰을 때입니다. 대죄를 지었다던가, 중병에 걸렸다던가, 사업이 곤두박질친다던가, 선한 사람이 고통 받거나 반대로 악한 사람인 것 같은데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을 보았을 때 등입니다. 이런 시련과 고통 앞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리가 생각하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이 얼마나 다른지를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이런 모습에 대해 이사야 예언자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 8)라고 했으며, 복음서에는 아브라함이 죽은 라자로에게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 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 2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넓고 깊은 이 구렁을 어떻게 건너 뛸 수 있는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우리들의 역설적인 결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 것을 통해서, 베드로가 폭풍우 치는 호수 위를 걸었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믿음의 사람들의 원형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 악과 싸우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삶의 고통과 죽음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들도 그분처럼 살기를 바라셨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도움이신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영을 통해서 우리는 나와 너 사이에 있은 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갈 수 있고, 이곳에서 저곳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로 건너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며
위에서 말씀드렸던 에니메이션의 마지막은 산 정상에 선 표범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자, 하늘에 있던 달(?)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없어지는 장면입니다. 표범이 산을 보며 달렸지만 그 산 너머에 있는 달을 보고 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달마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내가 갖고 있는 것과 내가 체험한 것이 아무리 좋아도 계속해서 그것을 떠나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나를 버리고 우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그리워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골고타를 오르고 그분과 함께 그곳에서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디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 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시 121, 1-2)라는 말씀을 자주 되새기며 살아가야 하는 때입니다.
'원고글 > 영혼의 동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검에 찔린 상처 (0) 2010.08.12 사순절을 보내면서 (0) 2010.05.20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0) 2010.02.22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 (0) 2010.02.16 생명의 강물을 따라 (0) 2009.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