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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부요하신 주님원고글/영혼의 동반 2010. 8. 12. 20:45
가난하지만 부요하신 주님
김정운 교수가 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를 읽고 있습니다. 저자 스스로 ‘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도무지 행복해지지 않는 걸까?’라고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이라 생각되는 것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책입니다. 읽으면서 저자 김정운 씨가 했던 질문을 다음처럼 바꾸어 보았습니다: ‘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도무지 행복하지 않은 걸까?’, ‘왜 그렇게 오랫동안 성당에 나가고 있는데도 신앙생활이 재미 없을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아주 가끔’ 신앙의 기쁨을 맛보며, ‘자주’ 신앙생활에 짜증을 내며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닐까? 안타깝게도 저만이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듯합니다. 왜 그럴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쓰레기 재활용 하지 말고
20년도 훨씬 더 지난 신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지금의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과 하늘공원으로 단장된 난지도 쓰레기 처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습니다. 보이는 것이 온통 쓰레기였습니다. 쓰레기로 된 높은 산이 있었고, 몇 십 미터 깊이의 쓰레기 계곡과 절벽이 있었으며, 쓰레기에서 나온 검붉은 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했던 일을 쓰레기를 뒤지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때여서 그곳으로 온 쓰레기 속에는 재활용 할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았는데, 그 속에서 재활용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모아서 팔 수 있게 종류별로 분류하는 일이었습니다. 머리 위에서는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 쬐고 있었고, 발 밑에서는 쓰레기가 썩으면서 나는 열기로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으며, 고약한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일을 했고, 쓰레기 속에서 먹고, 쓰레기 속에서 잠을 잤습니다. 한 달 보름동안의 이상한 체험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버리고 나서,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 8)라고 하셨습니다. 수도자인 저도 바오로 사도를 흉내 내면서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저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과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던 형제자매를, 나를 온전히 받아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한 사람과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돈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돈과 돈에 대한 욕심,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명예를 바라는 얻고 싶은 욕구들로부터 죽겠다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나의 바램과 자유와 의지를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이것을 버렸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버렸어야 할 것들을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저 자신을 보기도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제가 오래 전에 쓰레기로 생각하여 버린 것들이 아까워 쓰레기 더미에서 그것들을 뒤적인다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기 위해 담배는 물론 라이터까지 버린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쓰레기통을 뒤진다고 합니다. 담배꽁초 하나라도 찾기 위해서겠지요. 이런 사람들이 느꼈을 초라함과 자괴감을 저도 가끔 느낀다는 것이고 그때마다 입맛이 참 씁니다. 저마다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쓰레기처럼 버린 것, 이것들을 다시 뒤적거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쓰레기 재활용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님을 향하는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우리는 자기가 끼고 있는 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봅니다. 이것을 보충할 수 있는 적당한 이야기가 없어 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파란색 안경을 쓴 어떤 사람이 법당에 들어오면서 “아, 참 시원하고 좋다. 사람들 속이 시원하라고 파란색을 칠했구나”라고 말하고 나갔답니다. 빨간색 안경을 쓴 사람이 들어와서는 “아, 좋다. 마음이 따뜻하라고 빨간색을 칠했구나”라고 말하면서 나갔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밖에서 서로 ‘참, 색깔 잘 칠했죠’, ‘네, 그러게요’라고 말하며 좋아 하더랍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두 사람이 함께 살 때, 이 좋은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겠는가라는 것입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갈등과 충돌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는 아주 다양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 반응이 어떠하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런 상황이 당분간 계속된다는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서로 조금씩 아주 느리게 변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관점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그가 끼고 있는 색안경을 벗겨주겠다고 덤벼들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스스로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나 또한 그 사람에 의해 바뀌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볼 때 나를 바꿈으로서 상대방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 더 쉬운 듯합니다.
김훈 씨의 『칼의 노래』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나의 무(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사치는 성립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나의 위치는 늘 적과 맞물려 돌아갔다. 내가 함대를 포구에 정박시키고 있을 때도, 적의 함대가 이동하면 잠든 나의 함대는 저절로 이동한 셈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왜군이 언제나 ‘어떤 관계’안에 있었듯이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우리 신앙인들의 태도인데,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께서는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 3)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보다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나보다 낫게 여길 때, 우리들 사이에 있는 긴장들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것으로 되어 사라진다는 말씀이겠지요.
가난하지만 부요한 주님을 바라보며
어린 아이들에게 위대한 사람들을 본 받아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저 자신에게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저와 너무 멀리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런 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저와 비슷한 처지에서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고 있는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며 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가난하지만 나누어 줄 것을 무한정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 낮은 자리에 있지만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비참한 상태에서도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산 사람이라면 더 좋겠습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크고 위대하고 뭔가 그럴듯한 것만을 추구하려 합니다. 삶의 보람과 기쁨을 멀리서 그리고 대단한 것에서만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아주 가끔’ 행복할 것입니다. 세상을 나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위에 서려고 할 때, 나에게 지금 주어지는 행복과 기쁨을 흘려보내면서 ‘자주’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 9)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을 따라 살 때, ‘항상’ 평화와 자유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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