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가진 자연스럽고 억누를 수 없는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다. 책은 출판되고, 배포되고, 세상에 알려져서, 사람들이 사고, 읽으라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저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수의 저자들을 갖는다. 그것은 책을 읽은 사람, 읽는 사람, 읽을 사람 전체가 창조 행위에 있어서 책을 쓴 사람에게 마땅히 보태어지는 까닭이다. 작가가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어린아이의 모습에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뒤섞인 것처럼) 풍부한 상상의 세계다. (<흡혈귀의 비상>, 미셸 투르니에/이은주, 현대문학, 2002, 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