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이 좀 있을 뿐 깨진 데 없는 뚜겅을 열어 책상 한켠에 두고, 촉에 말라붙은 잉크를 녹이기 위해 욕실로 만년필을 들고 갔다. 세면대에 맑은 물을 받은 뒤 촉을 담그자, 짙은 청색의 가느다란 실 같은 잉크가 흔들리는 곡선을 그리며 끝없이 번져갔다. (한강 <희랍어 시간>, 27)
*** 한 달 뒤 하는 ‘글방 피정’ 때, 피정자들과 함께 <희랍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이 시간을 <희랍어 시간>을 꼼꼼하게, 마음에 새기며, 앞뒤를 따져 가면서 다시 읽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작가가 문장을 얼마나 공들여 썼는지 새삼스레 알고 놀라게 된다.
‘짙은 청색의 가느다란 실 같은 잉크가 흔들리는 곡선을 그리며 끝없이 번져갔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물에 떨어뜨린 잉크가 어떻게 번져 나가는지, 유심히 여러 차례 관찰한 다음, 혹은 그 장면을 수없이 상상하면서 말을 다듬은 후에나 가능한 표현이다.
아름다운 문장, 절묘한 문장,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문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 사물을 깊이 관조하면서 캐내고 찾아내는 보석과 같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묵상하고 관상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묵상하는 것은 깊이 사고하는 것이고, 관상한다는 것은 깊이 무심히 바라봄이고 오롯하고 나뉨없는 마음으로 들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