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은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됩니다. 단순한 숙박 시설인 여관과 호텔이 있습니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건물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의미가 부여된 기념탑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사찰과 사원과 성당과 예배당이 있습니다.
사원과 성당을 건드리고 파괴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건드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짓밟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박해 시대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종교시설을 짓밞은 다음에 올 역풍을 두려워 한다는 말입니다. 종교 건축물과 비슷하게 대해야 하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왕정 국가는 아니지만, 한 나라의 주권자가 머무는 곳을 짓밟는다는 것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짓밟는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 나라의 근간이 되는 법을 제정하면서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법을 함부로 하는 것이고,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을 함부로 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건축물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이 헬기를 타고 내린 무장 군인들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영화에서만 보았던 여러 장비를 장착한 무기를 들고, 그런 복장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 유리창을 부수고 침입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의 집이고 그들에게 온전히 맡겨진 건물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을 뛰어넘는 국회의원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수라장으로 된 공간에 국회의원들과 보좌관들 무장 군인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생중계 해 주는 대로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무서웠고 슬펐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되었습니다. 내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었던가.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고 있었던 드라마가 끝난 것인가. 며칠동앙 온 국민이 환청과 환각 속에서 살았던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닙니다. 현실이었습니다.
건물이 불타면서 무너지고,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떨어지고, 하늘이 섬광의 번쩍거리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있고,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영화속의 거대한 고릴라가 떠오릅니다. 모두 무성음으로 처리된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그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 십오년 ,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한나스와 가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1-3)
시간과 역사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 우리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 그리스도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역사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보게 되는 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아주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것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떠나서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교황 요한 바로오 2세의 회칙, <신앙과 이성> 12항)
시간과 역사안으로 들어오신 분이기에 우주의 창조주요 우주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