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을 알고 나서 믿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아닙니다. 믿음이 어두운 심연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뛰어내림이 타인의 말만 듣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저의 자유 의지로 할 수 있게 확신을 갖고 싶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달게 받으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자기에게 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들어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반복할 뿐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체험이 없고, 그래서 그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관심도 없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는, 십자가의 고통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고? 누가 나를 사랑해달라고 말이나 했나, 하고 시큰둥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부러운 시간입니다. *********
“너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리라.”(이사 7,9)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의 번역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만’ 동사의 두 가지 형태(’믿을 것이다‘와 ’서 있을 것이다‘)에 바탕을 둔 언어유희때문입니다.
그리스어 역본은 ’서있다‘를 ’이해하다‘로 번역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뢰라는 성경적 개념을 지성적 이해하고 하는 그리스적 개념으로 바꿈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크게 바꾼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 번역은 헬레니즘 문화와의 대화를 반영하기는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바탕이 되는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아하즈)임금에게 약속한 확고함은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이해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과 이스라엘 역사에 부여하신 일치에 대한 앎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이 필요하고 진리가 필요합니다. 지식과 진리 없이는 확고히 서 있을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빛> 23항-24항,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김영선 역,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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