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믿나이다.” 무엇을 믿는가.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는다. 구체적인 역사의 한 순간을 살았던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왜 믿는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믿는다. 내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 믿음 대상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은. 내 바로 옆방에서 자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말로 구체화된 예수님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왜 나는 너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면, 왜 나는 이런 방식으로 하느님을 따르고 있고 너는 그런 방식으로 따르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어쩌면 세례받기 전에 했어야 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내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수없이 들어온 말을 그냥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증거하고 증언하고 선포해야 할 메세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증언할 것이 없는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닌 것아닌가. 말장난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면,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인가. 믿음과 관련된 말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요구된다. 최소한 자기 자신을 위해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들은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명확하지 않다면, 그 언어로 지어진 건물인 허술할 수 밖에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의미에서이기도 하지만, 언어를 빌어서 내외적인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내외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언어가 중단된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제대로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성경을 풀이할 때에도 성경안에서만 풀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