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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원고글/바 롯 2009. 10. 15. 22:16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사라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歸天, 천상병)
몇 일 전, 한 할머니를 떠나보내면서 떠올랐던 시詩입니다. 그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분이셨고 주일미사 때에만 뵐 수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할머니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저는 그때마다 손을 잡아주고 등을 도닥여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때가 한 번 있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몇 주 전 할머니를 찾아가 함께 기도할 때였습니다. 할머니 아들의 통역을 통해 들은 말이었는데, 제가 결혼 하지 않고 아이들도 없이 사는 것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위해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고 장례미사를 준비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칠십 년을 넘게 사시면서 할머니가 깨달았을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말이나 글로 다 표현 할 수 없었던 많은 생각들을 어디에 두고 가셨을까?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었을까 아니면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지 않으면 안되었던 고통의 연속이었을까? 할머니를 향한 이런 질문들은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나자신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영원한 신비인 죽음. 우리는 이것에 대해 타계他界, 서거逝去, 열반涅槃, 입적入寂, 소천召天, 귀천歸天, 선종善終 등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해하고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곧바로 이곳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과 연결이 될 것이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어떤 것에 비유하며 사셨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천상병 시인은 삶을 이슬과 노을이라고 합니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아침이슬이나 저녁노을처럼 짧은 것이지만 투명하고 아름다우며 어떤 경우에는 황홀하기까지 한 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수없이 많은 일들의 의미를 모두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나의 것이라고 주장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스란히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기에 나의 것이라 주장하는 순간 이슬처럼 깨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삶을 하루 동안 멋지게 즐길 수 있는 소풍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소풍갔던 날을 가끔 떠올려 봅니다. 하루 해가 짧은 듯이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기쁨과 희망으로 가슴이 설랬던 순간도 있었지만 부끄러움으로 어딘가에 숨어 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두려움으로 주저 앉고 싶었던 때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순간들이 우리로 하여금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과 번개가 칠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했고, 밤이면 밤마다 자신의 청동거울을 닦고 있는 사람과 함께 밤을 지샐 수 있는 마음을 생기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중반기에서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캄캄한 숲 속에 있었다. 그 가열하고도 황량한, 준엄한 숲이 어떤 것이었는지 입에 담기조차 괴롭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진다. 어떻게 하여 그곳에 발을 들여 놓았는지 쉽게 말 할 수가 없다”라는 단테의 말이 바로 내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깊
우리에게도 언젠가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 온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운 소풍을 위해 준비해주셨던 분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만났던 아름다웠던 사람, 사랑했지만 충분히 사랑을 표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게 될 것이다. 내 가슴에 뽑히지 않는 못을 박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될 것이고, 세상에 살면서 풀어내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하루의 멋진 소풍을 마치고 돌아온 자녀들의 재잘거림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엄마와 같은 분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