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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과 진리의 산길>, 토마스 머튼, 바오로딸, 2009
* 신비적 합일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어떤 금욕적 기법으로도 이룰 수 없다. 하느님이 자유롭게 주신은 은총이 없다면 사람은 묵상과 내적훈련, 자기비움이나 성찰에 전념하더라도 하느님과 합일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의 본성 수준에 있는 이성의 노력으로는 더더욱 하느님과의 신비적 합일에 이를 수 없다.(103)
* 수덕생활과 신비생활이란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 영혼을 완전히 비우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이승에서 다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단 한 가지, 곧 완전한 자아포기를 뜻한다. (104)
* 성녀 데레사는 수녀들이 가능하면 훌륭한 신학자의 영적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관상가의 지도자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했던 자질은 학식이 아니었다. 학식 이전에 그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바로 분별력과 경험이었다. 그러면서도 성녀 데레사는 이 세 자기 자질이 모두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영적지도자가 학식이 없다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105)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성인이 영성생활 시작부터 지성적.정서적 활동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과 정적주의자 몰리노스의 큰 차이점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초심자들이 영적진리에 대해 묵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적원리는 물론 철학적 원리까지 이해하도록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말한다. (109)
* 인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개념과 사고와 판단으로만 지식을 얻는다. 하느님을 신비적으로 아는 것은 개념을 뛰어넘는 판단이다. (111)
*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분명이 알고 이해라려는 갈망은 기도를 처음 배우는 사람한테 필수적이다. 이는 독서와 묵상과 기도에 대한 맛을 자극한다. (113)
* 순수한 믿음은 딱딱하고 메마른 길이다. (115)
* 우리는 우리를 하느님께 이끄는 지식이 제시하는 수단을 이용할 수 있으며, 또 이용해야만 한다. 우리는 개념을 초월하는 하느님에 대한 모호하고 신비적인 지견조차 개념적 실체에 의존함을 안다. 그것은 하느님이라는 심연으로 뛰어드는 출발점이다. (118)
* 스콜라철학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하느님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법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 언어로 하느님에 대한 진리가 어떻게 설명되는지 이해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거짓 신비주의에 빠질 것이다. (121)
* 개념에는 한계가 있어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생각에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그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실체는 그 경계선에 울타리가 처져 있다. 우리는 또한 개념을 통해 제시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 (122)
* 하느님의 존재는 사람의 존재와 같지 않다. 우리가 하느님께 적용하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으로는 하느님의 본성을 설명할 수 없기에 부정의 길을 감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126)
* 부정의 길은 하느님에 대한 모든 개념을 공공연하게 거절한다. (130)
* 성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람의 지견이 궁극에 이르면 우리는 오히려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이해하는 모든 것을 초월하시기 때문이다."; "지식에 끝에 도달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는 분'으로 인식한다."(132)
*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긍정적 개념을 통해 하느님을 알며 나아가 하느님이 이런 모든 개념을 무한히 초월하신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133)
* 이론신학에서 이성은 하느님에 의해 계시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갈고 닦는다. 이론신학은 무엇보다 신앙에 따라 조명되고 논리적 사고력을 이용하는 이성을 통해 계시의 깊은 부분을 이해하려고 한다. (135)
☞ 하느님을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부정을 하지. 하느님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더라. 창조주 하느님, 영원하신 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생명의 원천, 육화되신 하느님, 심판자이신 분, 역사속의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 예비자 교리의 제목 몇 개만 나열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하느님에 대해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인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일면일 뿐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은 아니라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