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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외로웠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도 모르고, 전혀 알고자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독이란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보다 남에게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전달할 수 없거나, 자기는 어떤 생각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간주될 때 생기는 것이다. 나의 고독은 나의 어린 시절의 꿈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과 작업을 할 시기에 최고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그는 외로워진다. 그러나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를 더 예민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오직 모든 개체가 자기의 고유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고 동일시하지 않는 곳에서만 꽃필 수가 있다.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칼융.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집문당, 1990, 401)
☞ 2018년 읽으면서 메모해 놓았던 구절입니다. 칼 융이 만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했던 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고 삶의 연륜이 쌓이면서 아주 깊게 공감하게 되는 글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칼 융이 체험한대로 우리가 외롭고 고독한 것은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함께 있어도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때입니다. 자기에게 소중하고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시되거나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때입니다. 자기가 깨달았던 것과 자기 마음속에 흐릿하게 존재하고 있는 꿈과 이상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없을 때도 마찬가지로 외롭습니다. 이런 외로움을 실존적인 것이라 부르던 소외감이라 부르던 홀로 있을 수 밖에 없는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뚜렷한 '자기의식'을 갖게 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르며, 다른 사람과 하나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자기가 얼마나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자기'를 확립해 가는 이런 시간을 통과한 다음에야 우리는 진정 다른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그(들)와 더불어 살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소멸되어버리는 공동체는 한두 사람을 위한 공동체에 불과할 것이고, 구성원들 '각 개인'만 있는 공동체에서는 타인이란 자기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존재에 불과하게 됩니다. 칼 융은 수도자들처럼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수도 공동체 생활의 핵심이 무엇인지 꿰뚫어 알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