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덕 위 수도원기도.영성/북앤샵 글방 2019. 6. 15. 22:10
6월 15일, 토요일
니콜라스 판/허유영 역, 컬처북스, 2013
인터파크 명동점, 북앤샵 글방
2019년 6월 15일, 오후 2시-4시
<언덕 위 수도원>이 출판된 해가 2013년입니다. 제법 오래된 책입니다. 이 책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난 해 연말 이곳에서 북콘서트를 하고 다음에 이런 시간을 갖게 되면 어떤 책을 가지고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수도회의 다른 수도원에 들러 도서관에서 보았습니다.
먼저 눈에 띤 것은 산뜻하고 화려하고 멋진 사진이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라는 사람의 이름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건축가는 아니지만 건축에 관심이 있어 건축과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었기 때문에 낯선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라 투레트라는 수도원 이름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책을 훑어보면서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 많았습니다.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으면서 아주 독특한 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그의 건축물에 대한 전문적인 해설서도 아니었고, 라 투레트 수도원이나 알랭 쿠튀리에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니코라스 판이 라 투레트 수도원 사진을 찍고 쓴 건축기행도 아니었습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을 중심에 두고, 주변에 르 코르뷔지에와 알랭 쿠튀리에의 이야기가 있었고 저자 니콜라스 판이 찍은 사진이 있었고, 그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감독은 니콜라스 판이고 주연은 르 코르뷔지에와 알랭 쿠튀리에 신부 두 명이고, 무대는 라 투레트 수도원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영화를 소개할 때에 감독을 먼저 소개하고 주연과 조연 그리고 주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연인 르 코르뷔지에와 알랭 쿠튀리에 신부님에 대해 이야긱하고, 무대인 라 투레트 수도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독인 니콜라스 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
1887년에 스위스(라쇼드퐁)에서 태어나서 196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원래 이름은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입니다. 어렸을 때 미술공부를 했고 공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미술학교를 졸업하면서 스승 레플라트니에의 권고로 건축분야로 전환하게 됩니다. “내 스승 중 한 분은 나를 평범한 운명으로부터 슬며시 구제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건축가로 만들고 싶어하셨습니다. 나는 건축과 건축가를 몹시 싫어했다. 열여섯 살이 되지 나는 스승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을 따랐다. 건축에 뛰어든 것이다.”
그 후 이탈리아, 독일, 지중해 연안과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생과 삶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토대를 굳게 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글로 썼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내부로 자기 자신의 역사속으로 밀어넣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연필작업을 통해 사물이 내부로 들어오면 그것은 평생 거기에 머문다. 그것은 기록되고 새겨지는 것이다.” “그림은 목격자 없이 화가가 자기 자신과 벌이는 끔찍하고 치열하고 가혹한 전투다. 전투는 내부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정규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뛰어난 건축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을 그릴 때와 같은 마음으로 건축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공부했던 열정과 집념 때문일 것입니다.
르 코르부지에는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갑니다(1917년). 세상이 넓어지고 활동 영역이 넓어진 것입니다. 파리에서 <레스프리 누오보>(새로운 정신)라는 잡지를 창간합니다. 이 잡지를 통해 변화되고 있는 시대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이런 시대를 이끌어 가기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에 대해 씁니다. 이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르 코르뷔지에(르 코르보, 까마귀)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합니다.
파리 이후부터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구상하고 있는 건축물을 짓고 건축 이론(도미노 이론, 도무스+이노베이션; 신건축 5가지 요소, 필로티, 자유로운 평면, 리본창, 자유로운 정면, 옥상정원)을 선도하기도 합니다. 건축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지만, 미술과 조각과 공예에 대해서도 기량을 발휘합니다. 못하는 것이 없는, 전방위적 예술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2016년 세계 곳곳(스위스, 독일, 프랑스, 벨기에, 인도, 아르헨티나, 일본)에 흩어져 있는 그의 건축물 17개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유명한 건축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78세(1965년8월 27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 있는 오두막에서 휴가를 지내고 있었고, 지중해에서 수영하다 죽었다고 합니다. 이 오두막은 병중에 있는 아내 이본느 갈리를 위해 지어준 집(1951년)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꼭 있어야 할 것만 있는 4평 짜리 오두막이었다고 합니다. 1957년 부인이 세상을 뜨자 르 코르뷔지에는 오두막 옆 언덕에 부인의 무덤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자신의 무덤도 만들어 놓습니다. 물론 자기도 자기가 만들어 놓은 무덤에 묻힙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고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아내에 대해 “따뜻한 마음과 의지, 순결함과 단정함을 지닌 고상한 여인, 36년 동안 가정을 따뜻하게 해 준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이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건축가(김중업. 김수근)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거형태, 아파트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 집없는 많은 사람에게 쾌적한 주거시설을 마련해 주기 위해 아파트(유니테 다비타시옹, 1945) 개념을 적극 도입합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생각하고 있었던 인간중심의 아파트,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아파트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고 변화되었는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단지는 1961-1964년 지어진 마포 아파트 단지입니다,)
질문: 르 코르뷔지에의 삶에 대해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질문: <언덕 위 수도원>을 읽기 전과 읽고 난 뒤에 성당을 보는 눈에 차이가 있었습니까?
성당 짓는 신부, 알랭 쿠튀리에
르 코르부지에가 건축한 종교건축물은 롱샹 성당(1950-1955), 라 투레트 수도원(1953-1960)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완공된 피르미니 생 삐에르 성당(1970-78; 2004-2006년)이 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타가 인정하는 무신론자입니다. 이런 무신론자가 어떻게 이런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알랭 쿠튀리에라는 신부가 있었습니다.
알랭 쿠튀리에 신부는 르 코르뷔지에보다 10년 뒤인 1897년 태어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다리를 다쳐 일찍 제대했습니다. 그후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가 되었습니다. 미술에 조예가 깊었고 현대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현대예술을 성당 건축에 접목시키고자 끝없이 고민하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삶 때문에 20세기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쿠튀리에 신부는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롱샹 성당과 라 투레트 수도원을 짓기 전에도 모리스 노바리나와 함께 지은 아시 성당(1950년)을 지었고, 마티스와 함께 방스에 있는 도미니코 수녀원(1949-1953)을 지었습니다. 이 성당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눈에 익숙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성당과 상당히 다릅니다. 지금 보아도 이렇게 파격적인데 성당이 완성된 당시에야 말 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쿠튀리에 신부님은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습니다. 전쟁은 인간이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파괴하고 무너뜨려 극심한 혼란속에 빠뜨립니다. 사람들은 이런 혼란을 겪게되면 두려움 때문에 위축됩니다. 모든 문을 닫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부합니다. 모든 개인과 사회가 그렇고 교회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혼란속에서 새로운 싹이 움트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혼란을 두려워하면서도 새롭게 시작하려는 거센 흐름을 감지하고 이것을 선도해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선구자라고 부릅니다. 쿠튀리에 신부도 이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미니코수도회의 수도자이면서 예술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던 쿠투리에 신부는 예술가에게 종교가 있건 없건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가도 인간이므로 당연히 죄인입니다. 그들의 죄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두드러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남들보다 훨씬 충만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유롭게 우리를 위해 일하고 우리 교회의 벽화를 그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술가들은 창작을 통해 오백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놀라온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습니다.”
“모방속의 모방은 현대인드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줄 수 없습니다. 마네, 세잔, 르누아르, 고희,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같은 현대 화가들은 모두 밖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과거의 예술가처럼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전도한들 종세교회에 있는 예술 거장들의 작품만큼 강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쿠튀리에 신부는 무신론자이고 수도회를 '빌어먹을‘이라고 욕하는 르 코르뷔지에게 롱샹 성당 건축을 맡아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게 지금까지의 성당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여 그에 맞는 성당을 지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어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를 빛과 그림자의 건축가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그의 이름에 가장 걸맞는 건축이 롱샹 성당이라고 합니다. 롱샹 성당을 가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책에 나와 있는 사진을 보면 이 말이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라고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상영된 다큐멘타리 영화 <안도 타다오>에서 안도 타다오는 롱샹 성당에 들어가는 것이 빛의 폭포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롱샹 성당을 보고나서 건축가가 되리라고 결심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롱샹 성당을 통해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창세 1, 3)라는 말씀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르 코르뷔지에 자신도 자기가 건축한 롱샹 성당에 대해 아주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축성식이 끝난 다음에 아흔아홉 살 된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의 코르비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아주 우쭐했답니다.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축성식에 참석했어요. 그 성당은 근대 건축의 자장 혁명적인 대표작이 될 거예요.”
르 코르뷔지에의 이런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롱샹 성당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르 코르뷔지에와 쿠튀리에 신부에 대한 환호와 비난속에서 도미니코 수도원은 라 투레트 수도원 건축을 시작하려 합니다. 수도회는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쿠튀리에 신부는 이번에도 르 코르뷔지에가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수도회에서 격렬한 논쟁을 했을 것입니다.
이때 쿠튀리에 신부는 “하느님의 아들에 가까운 깊은 신앙과 재능을 갖춘 건축가가 수도원을 설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저는 신앙은 있으나 재능이 없는 건축가보다는 신앙은 없지만 천재적 재능을 가진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르 코르뷔지에가 라 투레트 수도원을 설계하고 짓게 된 것입니다. 쿠투리에 신부님은 이 수도원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54년에 세상을 뜹니다.
알랭 쿠튀리에 신부님은 1-2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사회에 교회가 적적하게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교회 건축을 통해서 조금씩 해보려고 노력했던 선구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쿠튀리에 신부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그의 안목과 통찰력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게 됩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바오로 6세 교황 때인 1965년에 폐막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은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입니다. 공의회의 이 정신을 가장 표현한 말씀은 이 공의회를 개최하신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당신의 창문을 열면서 하셨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나는 교회안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 창문을 열고 싶습니다.”
질 문: 알랭 쿠튀리에 신부님이 지었던 성당 중에서 마음에 드는 성당이 있습니까? 마음에 드는 성당 사진이 있습니까?
라 투레트 수도원
우리 교회안에는 수없이 많은 수도원 건물들이 있습니다. 그 많고 많은 건물들 중에서 라 투레트 수도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닷가의 조약돌 하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을 전제하고 <언덕 위 수도원>을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강아지를 위한 집을 하나 만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살 집을 손수 짓는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이고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말을 것입니다. 집짓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수도원을 짓는 것은 일반 건축보다 훨씬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성전을 짓는 일이면서 수도자들이 사는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으로서 거룩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하느님을 향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찬미, 경배가 이루어질 수 있게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비효율적인 것도 용납이 되는 곳입니다.
반면에 수도원은 수도자들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쉬고 공부하고 모임을 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자들이 기쁘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공동으로 모여 살기 때문에 공동체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고, 개인적인 공간도 보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많은 요구 조건을 쿠튀리에 신부님은 르 코르뷔지에게 “조용하며,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는 수도원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쿠튀리에 신부님 마음속에 있었던 라 투레트 수도원의 모습은 시토 수도회의 르 토르네 수도원(1160-1190)이었다고 합니다. 시토 수도회는 1098년 베네딕도 수도회로부터 개혁된 수도회입니다. 시토 수도회 수도자들을 세상과 단절되어 철저한 침묵과 고독속에서 삽니다. 공동체로 살면서 기도하고 일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시토 수도회 건축의 특징은 단정하고 넘치지 않으면, 실용적이되 사치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엄격함과 단순함과 규칙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면에 쿠튀리에 신부가 속해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는 사람들 속에 살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시토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과 상당히 아주 다른 형태입니다.
시토 수도회의 수도원과 비슷하게 지으려는 쿠튀리에 신부와 다른 수도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죠. 수도원을 짓는 똑같은 일을 하지만 내적인 지향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외적 형태 또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것을 추구하지만 다른 형태의 삶, 우리는 이것을 영성이 다르다라고 말합니다.
(영성이란 어떤 사람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이며 어떤 사람의 행동을 일어나게 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건전지처럼 어디에 별도로 있다가 필요할 때 끌어다 쓰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먹고 자고 일하고 말하고 농담하고 기도하고 건물을 짓고 방을 만드는 것 등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언덕 위 수도원>에는 라 투레트 수도원에 대한 니콜라스 판의 찬사로 가득합니다. 그렇지만 수도원에서 30년 넘게 생활하고 있는 저는 그곳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분들의 의견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니콜라스 판의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적으로 아름답고 건축학적으로 뛰어난 성당이고 수도원이지만 막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지 못하는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이야기를 가금 듣습니다. 건축을 한 사람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 사이에는 항상 어떤 괴리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파트에 입주했지만 그곳에 살면서 이것저것 불편한 것을 만나게 되면 건축한 사람에게 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니콜라스 판도 이것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사람이 실제로 살지 않는 건물은 설계하려 하지 않았으며, 사람과 공간의 비례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라 투레트 수도원에 있는 수사들의 방은 주거 공간으로서는 상당히 불편한 설계임에 틀림없다. 이 방들은 성인 남자가 양팔을 벌린 너비밖에 안되는 작은 방이다. 숨어서 도를 닦는 은수생활을 모르거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 방은 새장이나 동물 우리처럼 답답할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수사들의 방을 이렇게 좁게 설계한 것은 초기 교회와 동굴에서 생활하던 은수자들을 향한 존경의 표현이기도 하고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금욕생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230)
라 투레트 수도원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진과 사진을 찍은 니콜라스 판의 건축 해설을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질문: 라 투레트 수도원과 관련된 이야기와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습니까?
니콜라스 판
타이완의 사진작가입니다. 사진을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답니다. 빛을 기다리고 빛을 찾아 다니는 발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사진작가를 빛의 노동자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빛의 강약과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사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을 방문하여 사진을 찍기 전에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작가로서 사진 촬영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요. 2013년 쯤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 되는 시간인데, 지금까지 자기가 사진을 찍고 작업했던 방법에 대한 위기감까지 겹쳐 심각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 책을 내기 전 나는 창작 활동을 시작한 후 가장 큰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사진작가라는 나의 직업과 청년기에 형성된 나의 인생관, 가치관 같은 것이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소위 ‘중년의 위기’라는 것이 소리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라 투레트에 살고 있는 신부님으로부터 자기 수도원에 와서 사진을 찍어보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그때 소니사로부터 디지털 카메라를 선물 받았는데, 그 사진기를 시험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답니다.
이런 상태에서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있었을 것이고, 수도원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통해 공부하게 되고, 사진가로서 사진을 찍으며 라 투레트 수도원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건축이라는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와 유럽의 역사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수도생활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던 대로 니콜라스 판은 이런 것들을 모아서 한 편의 영화각본을 쓰듯이 글을 써나갔습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책 전반에 골고루 박아놓아 이것을 찾아가면서 읽는 기쁨이 있습니다.
“나는 제법 오랜 기간동안 그곳에 머물며 점점 수도원의 건축 배경과 시대의 관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들들이 퍼즐처럼 맞추어지며 또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위대한 예술 작품의 뒤편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오래전부터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던 종교와 예술, 그리고 생명을 향한 시야가 내 안에서 새로운 접합점을 찾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은 거울처럼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마치면서
“건축이란 건축물의 견고성을 보장하고 안락함을 충족시키는데 몰두하는 인간이 실용성이라는 단순한 의도보다 한 차원 높은 의도를 갖고서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기쁨을 주는 서정성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창조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다.”(르 코르뷔지에)
건축은 공간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건축하면서 어떤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어떤 용도로 쓰고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대해 고민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어떤 공간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활 형태가 달라지고 사람의 사고방식까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시간을 다스리면서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공간을 다스리면서 삶을 만들어 가는 존재입니다.
<언덕 위 수도원>을 읽으면서 건축과 예술과 역사와 문화와 종교에 대한 많은 이아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축과 사진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고, 그것을 단순하게 보는 것 뿐 아니라 해석하는 능력도 힘도 조금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이것들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 이 상 -
'기도.영성 > 북앤샵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세하고 정교하게 (0) 2019.07.21 철학의 위안 (0) 2019.07.20 태양을 보다 (0) 2019.05.19 2019년 상반기 북앤샵 글방 (0) 2019.04.25 침묵의 세계-향기책 (0) 2018.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