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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향기책기도.영성/북앤샵 글방 2018. 12. 16. 09:17
12월 16일, 일요일
향기로운 책
침묵의 세계
막스 삐까르/박갑성
성바오로출판사, 1980
명동 인터파크 북앤샵 글방
2018년 12월 15일
1. 우리 삶속의 침묵
하루에 몇 권의 새 책이 출판되는지 아십니까? 220종이랍니다. 일 년으로 계산하면 8만 3백종입니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 중에서 한 권을 구입해 읽는다면 그 책과 어떤 관계가 맺어진 것이겠지요. 더구나 그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것이 아니고 몇 번 정독을 하고, 그 책의 이곳저곳을 뒤적거려 가며 읽었다면 아주 특별한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달에 읽어보기로 한 책은 막스 삐까르의 <침묵의 세계>입니다.
<침묵의 세계>를 쓴 막스 삐까르(1888-1965)는 스위스인 이었던 부모아래서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일에서 교육을 받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을 기계처럼 취급하는 의학이 자기에게 맞지 않다고 여겨 의사직을 포기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화를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글을 많이 썼고, 가톨릭 신자로서 인간의 삶을 하느님과의 관계안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s는 글을 많이 썼씁니다.
제가 <침묵의 세계>를 처음 만난 것은 1983년입니다. 신학교 1학년 때였고, 책은 출판된 지 3년 되는 때였습니다. 첫 페이지에 있는 “언어의 기초는 거룩한 침묵이다”라는 글이 신선하다는 느낌을 넘어 충격이었습니다. 침묵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더 많았습니다. 그 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항상 이 책이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아무 곳이나 펼쳐 읽곤 했습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구절을 만날 때도 있었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게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암튼, 이 <침묵의 세계>가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어 하잖아요. 저도 제가 좋아하는 <침묵의 세계>에 대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침묵의 세계>에 대해 말 할 것을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막스 삐까르의 <침묵의 세계>라는 책을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책 제목으로 나와 있는 <침묵>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가? 제가 저에게 한 대답은 두 가지 다 좋아하지만, 둘 중에서 구태여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침묵’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침묵을 좋아하다보니 ‘침묵의 세계’가 좋아진 것이죠. 그래서 제 삶의 여정안에서 함께 하고 있었던 침묵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렸는데, 제 고향은 전라북도 남원입니다. 지리산 끝자락에 있는 산골이고 앞에는 섬진강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과 관계된 단편적인 기억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동네 뒷산으로 혼자 올라가 조그만 바위 위에 말없이 앉아 있는 저의 모습입니다. 그곳에 앉아 마을 앞에 있는 섬진강을 바라보고, 섬진강 너머에 있는 산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저 산 너머에 누가 살고 있을까. 저 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후 광주에서 학교 다닐 때,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철원에서 군 복무를 할 때도, 어렸을 때와 똑같이 혼자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스물여섯 살이 되어 수도원과 신학교에서 생활할 때도 똑같았습니다. 오히려 이때는 교수 신부님들께서 혼자있는 시간을 자주 많이 가지라고 권고하셨기 때문에 저는 아주 좋았습니다. 혼자 성당에서 침묵하며 앉아 있는 시간이 좋았고, 혼자 산책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 한쪽 귀퉁이에 앉아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뽑아다가 읽는 것도 좋았습니다.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제가 어디에 살던 어렸을 때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을 즐겼습ㄴ다.
사십대 초반 강원도 양양 산골에 살고 있었을 때는 수도원 주변에 있는 산에 자주 올라갔습니다. 어디에서건 동해 바다를 볼 수 있었고, 설악산 대청봉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동해를 바라보면서 저 너머에 누가 살고 있을까, 저곳에 가고 싶은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청봉 위의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이 저곳에 계시려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양에서 제주도로 옮겨 그곳에서 몇 년 사는 동안에는 매일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바다를 보면서 수평선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육지에 있을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서울 돈암동 작은 수도원에 살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똑같습니다. 이중창 덕분으로 밤이 되면 시내의 모든 소음이 차단됩니다. 그 침묵안에 고요히 앉아 있는 밤 시간이 아주 좋습니다. 이럴 때마다 이런 이런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주 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이 어디에서 어떻게 당신을 찾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소서. 당신이 여기에 안 계신다면 당신을 내가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어디서나 계신다면 왜 내가 현존하시는 당신을 뵙지 못합니까? 주여, 당신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내 당신을 갈망할 때 찾고, 찾을 때 갈망하며, 사랑할 때 찾고, 찾아낼 때 사랑하게 하소서.”(성 안셀모 주교의 <프로스로기온>에서)
침묵과 관계된 저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이 어찌 저만의 삶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도 혼자 침묵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았을 것입니다. 고요히 마음 편하게 침묵하며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강요된 침묵의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면 그 말이 벽에서 튕겨나오는 공처럼 튕겨 나오는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함께 나눌 사람이 없고, 힘든 일이 있어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는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홀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과 함께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홀로 있었던 시간이 결코 혼자가 아니었고 결코 헛된 시간도 아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침묵의 계절인 겨울 그 안에서 봄이 시작되고 있고, 땅속 깊은 침묵속에서 새싹이 움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침묵의 시간과 더불어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침묵의 세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침묵속에 일 년 사계절이 변해간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겨울도, 그리고 여름도 가을도 그러하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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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리와 말과 음악의 바탕인 침묵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만나 상대방과 사랑에 빠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3초라고 합니다. 그 외의 시간은 처음 3초에 결정된 것을 합리화하고 보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이겠지요.그 사람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될 것입니다.
책과의 만남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삽니다. 그 책을 훑어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줄의 글이 아주 마음에 들어 사기도 합니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그 책을 깊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기도 합니다.
<침묵의 세계>는 침묵에 대해 생각한 것을 쓴 책입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 대신 책 곳곳에 침묵에 대한 멋진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도 중에 언어는 침묵에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침묵속으로 흡수되고 침묵속으로 사라진다. 기도는 언어를 침묵속으로 쏟아붓는다. 인간을 떠난 기도의 언어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진다.”(227)
제가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이 침묵안에서 산다는 것이며, 침묵 속에서 기도가 깊어진다는 말입니다. 기도와 침묵 사이의 이런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 영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영화일 것 같습니까? <위대한 침묵>(2009년)입니다.
<위대한 침묵>은 알프스 산 1300미터 높이에 있는 카르투시오 수도회 수도자들의 일상생활을 일 년 동안 찍은 영화입니다. 상영 시간이 두 시간 오십분 정도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대화는 길어야 10분 정도이고 그것도 아주 짤막한 내용입니다. 감독이 대사를 집어넣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수도자들이 평생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며 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라곤, 수도자들에게 기도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전부입니다. 얼었던 계곡에 물이 흐르고 새싹이 돋는 것을 보면서 봄이 되었음을 압니다.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바람이 불고 비가 몰려오고 있음을 압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흘러가고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압니다.
기도생활과 침묵이 하나임을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침묵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보여주었던 영화였습니다. 이런 침묵에 대해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던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막스 삐까르는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와 말과 음악이 침묵과 함께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침묵은 말없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침묵없이 있을 수 없다.”(23) “음악은 침묵이다. 음악은 침묵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병행한다.”(22) 소리와 말과 음악이 침묵과 함께 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말이 되고 음악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막스 삐까르의 말이 사실임을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존 케이지(1912-1992)라는 미국의 작곡가이며, 전위 예술가입니다.
존 케이지가 1951년에 발표한 <4분 33초>라는 퍼포먼스가 있습니다. 존 케이지가 무대 위 피아노 앞에 말없이 앉아 있습니다. 가끔 피아노 연주하는 몸짓을 하고 악보를 넘깁니다. 사람들은 존 케이지가 악보 넘기를 것을 보면서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피아노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연주회장안에서 들리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청중들의 작은 기침소리가 들립니다. 옆 사람과 소근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이게 무슨 연주회야라고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립니다. 이 모든 소리들이 의미가 있고 음악의 일부를 이룰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침묵과 더불어 있기 때문입니다.
막스 삐까르처럼 존 케이지도 침묵이 없다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와 말과 음악이 의미가 없고 공허한 것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소리가 나지 않는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우리 시대가 얼마나 시끄러운 소음과 외침과 요란한 구호들로만 가득한지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알렌스 긴스버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공장, 맥주, 경찰, 컴퓨터, 종교, 책, 살인, 돈, 피곤한 얼굴...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나무, 너무나 부족한 침묵.”
원래 말은 힘을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말이 깊은 침묵을 거쳐 나온 말이라면 더욱더 사람들을 살려 내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그런데 요새 우리의 말과 글은 신속함과 즉흥성만 갖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문자를 날린다’라고 하겠습니까. 몸이 비대해지면 행동이 굼뜹니다. 꼭 필요할 때 강한 힘을 빨리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말이 장황하거나 화려하면 말이 갖고 있는 원래의 힘은 반감됩니다. 살이 빠지면 몸이 탄력적으로 되듯, 군더더기가 빠진 말에는 생동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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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침묵의 위험성
얼마 전까지 주로 피정과 관련된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피정이 무엇인지 몇 년 전 돌아가신 이윤기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잡다한 일상의 사무로부터 조용한 곳으로 피하여 오랜 시간 자신을 살피며 기도하는 일을 일컫는 아름다운 천주교 사투리다.”
피정을 원하는 사람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아세요? 잠시라도 조용한 곳에서 홀로 침묵하며 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피정에 오신 분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조용한 곳에서 홀로 침묵하며 머무는 것입니다. 홀로 있기를 원했고 침묵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시간이 주어지고 그런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는 그것을 힘들어 하고 심지어 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침묵을 바라는 것과 침묵속에 사는 것이 별개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침묵에 대해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침묵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침묵은 말린 소의 혓바닥이나 매력없는 처녀의 경우에나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
현실을 살펴보면 침묵이 항상 좋은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침묵하는 것이 용기없음이고, 비겁한 것이고, 불의를 용인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침묵은 비난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침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정치철학자가 있습니다. 독일 출신 유대 정치철학자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체포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했습니다. 이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나치의 친위대였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깊게 관여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일이 패하자 이름을 바꾸고 아르헨티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정보기관에서 체포하여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이 재판에 방청객으로 참석한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기는 죄가 없다. 법을 어긴 적도 없고 유대인을 죽인 적도 없다. 윗사람이 시킨대로 했을 뿐이다. 자기는 잘못이 없다라고 항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해에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보면서 놀랍니다. 그가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이었고, 평범한 아빠였고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숨어서 살고 있었지만 길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인 사람이 6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에 적극 가담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이 사실을 이해하고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악이 어디에나 있다는 것입니다.
침묵이 우리 삶의 토대이고 우리의 삶 어디에든지 뿌리를 내리고 있듯이 악도 우리 삶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침묵은 부드럽게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악은 아주 교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드러나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삶을 파괴합니다. 막스 삐까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언어이지 침묵이 아니다. 언어가 침묵과의 연결을 상실하면 쇠약해 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오늘날 은폐되어있는 침묵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침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어와 인간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10)
삶속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고,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침묵이라는 명목으로 불의와 거짓을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여기서 거짓과 불의와 악을 폭로 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가 적당한 자리는 아닌 것 것 같습니다. 다만, 침묵처럼 악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침묵을 추구하는 사람이 과연 무엇 때문에 침묵을 추구하는가라고 자문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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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로운 탄생을 위한 침묵
지난 5월부터 지금까지 저는 가능한 하느님, 예수님이라는 말을 피해서 말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접 관계가 없는 인터파크 명동점 안에서 하는 강의였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리고 제 강의를 들으러 이곳에 오는 분들 중에 신자가 아닌 분들이 한두 분이라도 계실텐데, 이분들에게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지 말자라는 의도였스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신앙의 용어를 써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몇 일 뒷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태어난 날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날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죽은 날짜를 기억하고 태어난 날은 자연스럽게 잊혀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 이상합니다. 2천 년 전에 태어나셨다가 30여년 정도 아주 짧게 살다가 돌아가셨죠. 그런데 아직까지 예수님이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서 날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며, 매순간 우리 영혼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왜 그럴까요.
700년 전에 독일에 엑카르트(1260-1328)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부였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스승, 사부라는 뜻인 ‘마이스터’라는 수식어를 붙여 마이스터 엑카르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학자였고 유명한 강론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회 가르침과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의 가르침과 견해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빗나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엑카르트가 성탄 전야 미사 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강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선택했습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 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 14-15)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ㅎ는 부드러운 침묵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한 밤중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다는 강론이었습니다.
이 강론 중에 엑카르트는 예수님의 세 가지 탄생을 덧붙여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탄생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영원에서부터 하느님의 품안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영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상상력이란 열어놓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길 들여져있는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낯선 길로 들어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상력을 동원하여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 1)라는 말씀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온 세상이 깊은 어둠에 싸여있고, 그 위를 하느님이 휘돌고 있는 모습. 역동적이면서 고요함과 침묵으로 가득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창세기의 이 말씀은 요한 복음서 서문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 10)라는 말씀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탄생은 고요와 침묵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신비로운 탄생입니다.
두 번째 탄생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 내려오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매년 기념하고 있는 성탄절이죠. 이 두 번째 탄생도 고요와 침묵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탄 때마다 부르는 성가 중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고요와 침묵과 더불어 겸손이라는 덕목이 있어야 두 번째 탄생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하늘에 있다가 땅으로 내려오기 위해서,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으로 되기 위해서 자기를 내려놓고 낮추는 겸손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성탄 때마다 볼 수 있는 베들레헴의 마굿간과 구유와 그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아기 예수님 주변에 요셉과 마리아가 계시고, 양치기와 동방박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기 원한다면, 2천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가난하고 소외받고 따돌림 받으며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안에서 이런 예수님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탄생은 예수님께서 각 개인의 영혼안에서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각 개인 사이에 일대일의 관계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맺어질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때 우리 영혼에 그분이 새로 탄생하신다는 것입니다. 깊은 사랑에서는 말이 별로 필요없습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이런 깊고 깊은 사랑에로 가는 여정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그냥 고요히 머무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사랑의 상태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고요히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흘 뒤며 성탄절입니다.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요란합니다. 화려한 불빛이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함께 합니다. 새로운 한 해에 대한 설렘과 바람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주 휘황한 불빛 너머, 어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어둠과 침묵이 생명의 원천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시간을 막스 삐까르가 <침묵의 세계> 마지막에 인용했던 키에르케고르의 말로 마치려고 합니다. “현대세계의 상태, 인간생활 전체가 병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의사로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하는 상담을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침묵을 창조하라. 인간을 침묵에로 인도하라. 만일 하느님의 말씀이 소음속에서도 들리게 하려고 소란한 수단을 써서 시끄럽게 소리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침묵을 창조하라.”(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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