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한 시간과 공간생활글/생활 속에서 2019. 4. 19. 09:03
4월 19일, 금요일
자기가 즐겨 찾는 장소가 있다. 기도하기 좋은 곳이 있다. 산속 고요한 곳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다. 앉아 있을 만한 마른 나무등걸이 있으면 좋다. 가끔 새소리가 들릴 뿐이다.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 고요함을 새소리가 흩어 놓는다. 잠시 뒤 새 소리가 그치고 산속은 더 깊은 고요해진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린 햇빛을 볼 수 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햇살이지만 나뭇잎과 숲속의 고요함으로 부드럽다. 그런 시간과 공간에 앉아있는 자신을 의식한다. 현존이라고 한다. 넓은 숲속이 자기가 앉아 있는 한 점으로 모아져 깊고 깊은 곳으로 된다. 흩어지지 않고 일치되어 있는 정밀하고 적막한 공간이 내적인 것에로 옮겨진다.
기도할 때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하루의 피로로 사람들이 곯아떨어진 시간이다.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지만, 그 시간이 주는 내밀함 때문에 가끔 일어난다. 잠든 사람들이 깨어날까보아 고양이 걸음을 한다.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어둠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사람들이 깊이 잠든 시간은 사물들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낮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낮에는 침묵하고 있었던 사물들이 말하는 시간이다. 그들의 말은 낮시간과 다른 귀로 듣지 않으면 안된다. 침묵의 귀로 들을 때 쉽게 들린다. 침묵이 말없음이라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말없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말이지만 사실이다. 성당에서도 그냥 침묵할 뿐이다. 깊고 깊은 침묵으로 현존하는 그분 앞에 머물뿐이다. 결코 혼자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침묵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깊고깊은 넓고넓은 침묵의 하느님, 하느님의 침묵을 혼자서 차지하고 혼자 누리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다. 삿된 생각이지만 그것마저도 허용되는 넓고 깊은 침묵이다.
이런 시간과 공간의 유용함은 계산될 수 없고 측정될 수 없는 것이지만, 한 인간을 정화한다. 너무도 약하고 섬세해서 아주 쉽게 상처를 받는다. 조심스레 다가가야 하고, 자기 생각과 의지와 욕심을 앞세우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허락을 먼저 얻어 접근해야만 한다. 거룩한 시간이라 하고 거룩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하느님을 드러나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생활속에서 이런 거룩한 시간과 공간이 허용되지 않고 심지어 망가질 때 인간의 영혼은 고갈된다. 내적으로 분열되어 그 어느 곳에서도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없다. 분열되어 있는 사람들,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 어떤 형태로든 치유되어야 할 사람들을 이런 시간과 공간에로 인도해야 한다.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허용된 사람은 복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