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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이름생활글/생활 속에서 2019. 4. 18. 17:02
4월 18일, 목요일
"두 사람이 진심으로 함께 할 때,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함께 한다."
『바이올린과 순례자』, 마틴 슐레스케/유영미, 니케북스, 2019, 322)하느님의 이름으로 함께 한다고 하지만, 저 마다 자기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더구나 '하느님'이라는 말 자체가 더럽혀지고 찢겨지고 왜곡된 경우는 또 얼마나 많던가. 하늘의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하느님을 지켜드리기 위해 하느님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한 이유다. 사람들의 입에 올려지지 않고 불리워지지 않는 하느님은 자신을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희로애락과 아무 관련이 없는 박제된 하느님으로 되어갈 뿐이다.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친구를 부르듯이 불릴 수 있는 예수라는 사람이 되셨다. 예수는 너무도 평범하고 흔하고 만만한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너무 흔해서 하느님과 관련된 어떤 말도 사용할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 외에는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분이 보여준 사랑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달랐다. 이런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살마도 없고 귀로 들어 본 사람도 없다."(이사 52, 13-15).
둘이나 셋이 함께 모인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 진심으로 함께 하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이 정화되는 것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이 되살리는 것, 거룩한 일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도내의 사랑이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으려 무진애를 쓰지만, 하느님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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