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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강물을 따라원고글/영혼의 동반 2009. 12. 29. 23:14
생명의 강물을 따라
2010년 1월
생명의 원천인 말씀
너덜샘, 뜸봉샘, 검룡소, 데미샘. 이 지명들은 남한에 있는 4대 강의 발원지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너덜샘은 낙동강, 뜸봉샘은 금강, 검룡소는 한강, 데미샘은 섬진강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데미샘을 제외한 다른 발원지에는 가보지 못하고,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는데 아주 작은 샘이었습니다. 이 자그마한 샘에서 나온 물이 흐르고 흐르면서 큰 강이 되었고, 이 강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에 강이 있듯이, 인류 역사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이 있음을 창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졌다”(창세 2, 10).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이 강물이 동산을 촉촉하게 적신 다음 세상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가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듯이 우리 각 개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도 강이 있고 그 강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이 펼쳐지는 듯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것도 사실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강의 근원인 샘물을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계시헌장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원천이며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모든 시대를 위하여 단 한 번 기록된 ... 하느님의 말씀이 간직하고 있는 힘은 매우 큰 것이며 교회에 대하여는 의지와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그들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영신적 삶의 순수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21항). 우리는 공의회 교부들의 이 말씀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끝없는 열정, 항구하게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하느님 말씀에 따라 생활하는 삶이 따르지 않으면 말씀의 신비라는 바다에 잠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어라
10여 년 전, 강원도에 있는 수련소에 있을 때 한 교우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성경을 다 읽어 보셨습니까?”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분의 의도는 당시 많은 교우들이 열정적으로 성경통독과 성경필사를 하고 있던 때라 ‘성경통독을 해보았느냐’라는 뜻이었는데, 저는 ‘통독’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수련자들에게 ‘성경을 통독해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는데 그들도 저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모든 것을 다 제켜놓고 성경을 통독하기로 했습니다. 6박 7일 동안 한 자리에 모여 돌아가면서 소리를 내어 성경만 읽었습니다. 속도중심으로 읽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말씀을 별로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도 통독을 했는데, 양동이 물로 목욕한 것처럼 되지 않았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도 많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말을 배우고 하느님 말씀의 신비에 다가가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읽는 것입니다. ‘그냥 읽는’ 이 일을 통해서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몸과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십시오. 끈질기게 그 일에 매달리시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읽은 일에 헌신하시오. 읽다가 닫혀진 문을 만나거든 두드리시오. 그러면 ‘문지기가 열어 주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문지기가 당신에게 문을 열어 줄 것입니다”라는 오리게네스의 말이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새겨라
성경을 몇 번 통독하고 나니 다음에는 말씀을 필사하고 싶어졌습니다. 수련소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활동은 적고 시간은 많아 쉽게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 정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필사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몇 달 뒤 필사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지자 그만 두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교구의 작은 본당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 교구에서는 성경을 읽고 쓰고, 말씀과 더불어 기도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해서는 교우들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성경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잠시 쉬고 있었던 성경필사를 다시 시작했고, 교우들에게도 저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필사하자고 권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의 말씀을 내 몸과 마음에 새기는 일입니다. 쌍날칼보다 날카로운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관절과 골수에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키도록 하느님의 말씀에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가 형성되고,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말씀과 함께 살라
본당 교우들이 하느님 말씀에 대해서 조금씩 눈을 뜨자 성경에 관한 질문이 많아지자, 교우들에게 말씀을 읽고 쓰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를 하다가 한 교우와 아주 크게 다투었습니다. 서로 있는 대로 화를 내었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상태에서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자마자 “신부님, 성경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 전화했습니다”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뭔데요?”라고 응답했는데,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무슨 파(派)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가야파가 무슨 파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야파가 무슨 파(派)입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고 잠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웃음보다는 화가 더 났습니다. 그래서 “그건요, 성경에 나오는 양파의 일종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씁쓸한 마음이었고, 그 무렵에 필사하고 있었던 요나서가 생각났습니다. (짧고 재미있으니 한 번 읽어보세요.) 요나가 니느웨에 베푼 하느님의 자비에 화를 내며 그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아주까리 밑에 있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너는 그토록 가엾이 여기는 구나! 그런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을 내가 어찌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요나서의 말씀과 교우들에게 했던 저의 말과 행동이 겹쳐졌습니다. 부끄러웠고 혼자 있었지만 어딘가에 숨고 싶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성인성녀들은 생명의 샘인 하느님의 말씀에로 되돌아가라고 하셨고, 신앙공동체를 쇄신하고 지지부진한 우리의 신앙을 되살리기 위해 하느님 말씀에로 되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세상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 그것은 강물을 따라 세상 안으로 흘러들어가 사는 것이며, 세상 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을 갈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에 지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 37-38)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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