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신이 될 수도, 더군다나 신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초인이 나타나 이 세계를 주재한다면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니체 이후 일 세기 동안 사람이 만든 재앙은 인류의 역사에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인민의 영수니, 국가의 원수니, 민족의 지도자니 하는 형형색색의 이름을 가진 초인들과 그들의 폭력적 만행이 끼친 영향은 극단적 자아도취에 빠져 황당한 소리를 지껄이는 철학자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77)
* 문학이 일단 국가를 칭송하거나 민족을 위해 기치를 올리고, 정당의 대변자가 되거나 계급, 집단 등을 대변하게 되면, 널리 전파되고 기세등등해질지는 몰라도 본성을 상실하고 권력이나 이익의 대용품이 되어버립니다. (78)
* 저는 문학을 할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문학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했고, 그것이 인간의 의식을 견지하도록 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80)
* 혼잣말은 문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통한 교류는 그다음 일입니다. 인간은 느낌과 사고를 언어에 쏟아부어 문자로 표현함으로써 문학을 이룹니다. 문학은 본래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창작하는 그 순간에 이미 자기 긍정을 얻는 것이지요. 문학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자기만족적 요구로부터 시작됩니다. (80)
* 언어는 인류 문명사상 최고의 결정체입니다. 언어는 매우 정밀하고 파악하기 어렵과 철저하며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인간이 인지한 바를 꿰뚫고, 인지의 주체인 인간을 세계에 대한 인식과 연결해 줍니다. 쓰인 문자는 또한 그토록 절묘하여 고립된 개인이 민족과 시대를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게 해줍니다. (81)
* 문학에 대한 제한은 언제나 문학 외적인 것, 즉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 풍속적인 것에서 오기 마련이지요. 인간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된 심미는 문학작품이 유일하게 배제할 수 없는 판단의 준거입니다. 작가의 무절제한 자기연민은 일종의 유치함입니다. 서정에도 여러 차원이 있는데, 가장 높은 경지는 냉정한 눈으로 조용히 관조하는 것입니다. (83)
* 작가의 심미 판단마저 시장의 구미에 맞춘다면, 이는 문학의 자살 행위나 바를 바 없습니다. (84)
* 권세가가 몇 명의 적을 조작해 민중의 적의를 딴 데로 돌리고자 할 때 작가는 일종의 희생물이 됩니다. 사실 작가와 독자는 정신적인 교류를 하는 관계이고, 피차 만나거나 왕래할 필요없이 작품을 통해서만 소통하면 된다. 문학이란 인류에게 있어 소멸될 수 없는 행위이며, 독자와 작가 쌍방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오늘날 문학은 이 사회의 상품 소비적 가치관에 대항해 생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외로움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85)
* 작가는 사실 창조주 노릇을 할 수도 없고, 자신을 부풀려 예수가 될 수도 없습니다. 작가는 예언자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에 살며 거짓을 없애고, 망상을 버리고, 이 순간을 똑똑히 직시하는 동시에 자아를 관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학은 인간의 자신에 대한 관조에 불과합니다. 관조하는 그 순간에 빛을 받은 자신의 의식이 싹을 띄우는 것이지요. 진실이란 문학에서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품격입니다. (88)
* 작가가 자신을 파악하는 통찰력이 작품 품격의 우열을 결정합니다. 이것은 문자 놀이나 창작 기법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붓끝에서 나온 것이 진실’이라는 말은 붓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뜻입니다. (90)
* 설사 문학이 허구라 하더라도 창작 태도를 엄숙히 견지하는 작가의 붓끝에서는 인생의 진실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문학은 현실을 모사하는 데 그쳐선 안되며, 현실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 현실의 힘축적 의미를 다루어야 합니다. 진실한 감정에서 벗어나 상상, 생활의 경험에서 멀어진 허구는 창백하고 무력할 뿐입니다. 저주와 축복이 있는 것처럼 언어에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습니다. (91)
* 언어는 단순히 개념과 관념을 실은 수레가 아닙니다. 그것은 감각과 지각을 동시에 건드려 움직입니다. 그래서 부호와 기호로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언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발화되는 어휘 뒤에 숨은 말하는 이의 의지와 동기, 어투와 정서는 개념과 수사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언어를 필요로 하는 것도 단순히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92)
* 인류의 문명과 동시에 탄생한 언어는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기묘하고 끝없는 표현력을 발휘합니다. 작가의 일은 언어가 내장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개척하는 것입니다. (93)
* 문학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긍정입니다. 이 영원한 현재에 개인의 생명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문학다워지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94)
* 작가가 시장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면, 문화 생산품 제작 원리에 시류의 구미에 맞추지 않으면, 다른 길을 찾아볼 수 밖에 없습니다. 문학은 인기 서적 리스트가 아닙니다. 매체를 추종하는 작가가 쓰는 것은 광고나 다름없습니다. 작가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쓰고자 하는 바를 쓰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긍정일 뿐 아니라 사회에대한 모종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95)
* 역사의 거대한 규율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리덮을 때 인간은 자신의목소리를 남겨야만 합니다.(96)
(<아버지의 여행 가방>, J.M.G 르 클레지오 외, 문학동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