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의 빛, 교회 전통은 이 말로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위대한 선물을 가리켰습니다. (1항) * 죽음은 인간의 눈이 태양 빛에 철저하게 차단된 곳입니다. (1항) * 믿은 이들은 봅니다. 그들은 그들의 여정 전체를 비추어 주는 빛으로 봅니다. 그 빛은 지지 않는 샛별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1항) * 신앙의 빛은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을 비출 수 있기 때문에 유일합니다. 이 강력한 빛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욱 근원적인 원천에서 나옵니다. 그 빛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생겨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초자연적인 선물인 신앙은 우리 길을 밝히는 빛이며, 시간 속에서 우리의 여정을 인도하는 빛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빛입니다. (4항) * 교회는 결코 신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선물인 이 신앙은 교회가 걷는 순례의 길을 지속적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기르고 북돋워 주어야 하는 것임을 교회는 알고 있습니다. (6항) * 이 말씀, 사람이 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때, 성령계서는 우리를 변모시키시어 미래로 가는 길을 밝혀 주시고, 희망의 날개를 달고 그 길로 기쁘게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7항) * 신앙은 들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보지 못하지만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말씀은 부르심과 약속을 모두 포함합니다. 첫째, 그 말씀은 고향을 떠나라는 부르심이며, 새로운 삶에 개방되라는 초대이고, 미지의 미래로 이끄는 탈출(exodus)의 시작입니다. 신앙이 아브라함에게 제시하게 될 전망은 신앙의 길을 걸을 때에만 열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은 또한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네 후손은 그 수가 많아질 것이며, 너는 위대한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 먼저 하신 말씀에 대한 응답인 아브라함의 신앙은 언제나 기억이라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억은 과거의 사건들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기억으로서, 미래를 열어 줄 수 있고 그가 걸을 길에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억’으로서 신앙이 얼마나 희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9항) * 말은 찰나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충실성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역사를 통하여 우리 여정의 연속성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신앙은 이해합니다. (10항) * 신앙은 시나이 산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약속의 땅을 상속받기 위해 떠나는 긴 여정에 대한 초대입니다. (12항) * 신앙은 그 본성상 보이는 것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소유를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신앙은 적절한 때에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얼굴의 신비를 존중하면서 빛의 원천을 향해 마음을 열라는 초대입니다. (13항) * 우상이란 우리 자신을 현실의 중심에 두고 우리 손이 만든 작품을 숭배하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13항) * 신앙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믿는 분, 곧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현현이실 뿐만 아니라 믿기 위해서 우리가 일치되어야 할 분이십니다. 신앙은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듯이 그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8항) * 요한 성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신앙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동사의 다양한 형태를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진리임을 ‘믿는다’는 표현(요한 14,10)과 함께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에 관해서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요한 6,30).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우리 삶 안에 맞아들이고,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안에서 그분과 결합되어 그분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믿습니다‘(요한2,11). (18항) * 신앙 안에서 믿는 사람인 ’나‘는 타자이신 분께서 들어와 사실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타자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확장됩니다. 따라서 믿는 이의 삶은 사랑 안에서 넓어집니다. (21항) * 신앙은 사적인 문제나 개인주의적인 개념이나 주관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신앙은 들음에서 나오며, 말로 표현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22항) * “너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리라.”(이사 7,9)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은 예언자의 말을 다르게 옮기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이 문장에는 ’아만‘(aman)동사의 두 가지 형태(’믿을 것이다‘와 ’서 있을 것이다‘)에 바탕을 둔 언어 유희가 드러납니다. 이 성경의 그리스어 역본은 ’서 있다‘를 ’이해하다‘로 번역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뢰라는 성경적 개념을 지성적 이해라고 하는 그리스적 개념으로 바꿈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크게 변형시킨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분명히 헬레니즘 문화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바탕이 되는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의 <고백록>에서 확고히 서 있기 위해서는 진리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해하는 것‘과 ’서 있는 것‘을 종합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신 안에 ... 당신의 진리 안에 저는 서 있을 것이며 확고하게 자리 잡을 것입니다.”(11권 30장 40절) (24항) * 우리는 지식이 필요하고 진리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지식과 진리 없이는 확고히 서 있을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24항) *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진리의 위기 때문에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더 진리와 신앙이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문화에서는 기술의 진리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기능적이고 삶을 좀 더 편하고 쉽게 만드는 것이 진리로 여겨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진리는 각 개인의 내적 확신에 충실한 것입니다. 위대한 진리 곧 개인과 사회의 삶을 포괄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진리는 의심스럽게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런 진리는 지난 세기에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말살하기 위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강요한 커다란 전체주의적 체제에서 내세웠던 것이 아닌가? (25항) * 성경에서 마음은 인간 존재의 중심으로 인간의 모든 차원, 곧 몸과 정신, 내면성과 세계와 타인을 향한 개방성, 지성과 의지, 정서가 서로 엮어지는 곳입니다. 마음이 이 모든 차원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그 마음에서 진리와 사랑에 우리 자신을 열고, 이 진리와 사랑에 감동을 받아 근본적으로 변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은 덧없는 감정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서적 부분과 연관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은 또한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열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랑의 여정, 곧 자아라는 폐쇄된 울타리를 떠나 다른 이를 향해 나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사랑이 진리와 아무 관련이 없으면 그 사랑은 덧없는 감정의 영향을 받기 쉽고 세월의 시련을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27항) * 사랑이 진리를 필요로 한다면 진리 또한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진리를 사랑없이는 차갑고, 비인간적이며, 일상의 삶을 답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진리의 체험이며, 사랑받는 이와의 일치를 통해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은 곧 관계에 바탕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기에 공유된 인식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이는 타자의 눈을 통해 보는 시각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유하는 시각입니다. (27항) * 성경안에서 앎은 들음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신앙의 인식은 들음의 의미와 연관됩니다. 신앙은 시간의 흐름과 결부된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선포될 시간이 필요하고, 그 말씀에 대한 지식은 제자로서 길을 걸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들음이라는 경험은 인식과 사랑의 연관성을 잘 드러냅니다. 보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리스 문화의 특징이었습니다. 성경의 이해는 그리스인들의 이해와 대조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스인들의 인식은 현실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아는 것을 보는 것과 연관지었기 때문입니다. (29항) * 구약성경은 (들음과 봄)의 두 가지 인식을 하나로 결합시킵니다. 하느님을 말씀을 듣는 것이 그분의 얼굴을 뵙고자 하는 갈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들음은 개인적 부르심과 순명을 강조하고, 진리는 시간 안에 계시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보는 것은 여정 전체에 대한 온건한 전망을 마련해 주고 하느님의 커다란 계획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29항) * 신앙의 인식 수단이 들음과 봄의 관계는 요한 복음서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넷째 복음서에서 신앙은 듣는 것인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들음은 사랑의 고유한 인식 형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다른 한편, 신앙은 보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빈 무덤 앞에 서 있던 요한은 “보고 믿었습니다”(요한 20,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는 온전한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들음과 봄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종합은 사람들이 뵙고 경청하는 예수님이라는 분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30항) *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요한 1,1) 강생을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지셨고, 오늘까지도 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만지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혈병을 앓다가 예수님을 만져 치유를 받은 여인에 관한 단락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으로 그분을 만지는 것, 그것이 곧 믿는 것이다.“ (31항) * 하느님께서는 빛이시며, 진실한 마음으로 찾는 이들은 그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찾는 모습은 별들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온 박사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빛은 그들을 위하여 길이 되고, 구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을 안내하는 별이 되었습니다. 신심 깊은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눈을 감안하신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갈 때 마치 여명 때 별빛이 사라지듯이 인간의 빛이 하느님의 찬란한 빛 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적인 불에 가까이 갈수록 마치 거울이 빛을 반사하듯이 더욱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35항) *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이미 ”마음의 열망으로“ 하느님을 찾았으며, ”하느님께서, 홀로 침묵하시며 당신을 찾는 그를 가엾이 여기실“때까지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스스로 물으며 온 세상을 돌아다녔다“라고 말합니다. (35항) * 신학은 신앙없이는 불가능하며, 신학은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절정을 이룬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과정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다만 하느님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들려주시는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36항) * 신앙은 듣는 것이자 보는 것이기 때문에 말과 빛처럼 전달됩니다. 믿음은 마치 초 하나가 다른 초에서 그 불을 옮겨 받듯이 사람과 사람의 집촉을 통하여 전달됩니다. (37항) * 역사 안의 만남에서 탄생하는 신앙은 시간 속에서 우리의 여정에 빛을 비추기에 모든 시대를 통하여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끊어지지 않은 증언의 고리를 통하여 예수님의 얼굴을 뵙게 됩니다. 나는 나보다 훨씬 더 더래 전에 일어났던 일을 혼자서 알아낼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만남으로써 우리의 삶은 폭넓어집니다. (38항) * 혼자서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이란 다만 믿는 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결정이 아니며, 믿은 이의 ‘나’와 하느님이신 ‘당신’, 곧 자율적인 주체와 하느님 사이의 사적인 관계도 아닙니다. 신앙은 그 본성상 ‘우리’에게 열려있고, 언제나 교회의 친교안에서 발생합니다. (39항) *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는 ‘자아’의 공간이 확장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관계들이 맺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9항) * 신앙은 그것을 증언하고 전달하기 위한 어떤 틀을 필요로 하며, 그 틀은 전달될 것에 알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의 충만함을 전달하는 데에는 인간의 몸과 정신, 그의 내면성과 관계성, 곧 전인격을 참여시킬 수 있는 특별한 수단이 있습니다. 이 수단은 교회의 전례안에서 거행되는 성사들입니다. 성사들은 우리 삶의 시공간과 연결되고, 인간의 모든 감각과 연관된 육화된 기억을 전달합니다. (40항) * 신앙의 성사적 성격은 성체성사에서 가장 뛰어나게 표현됩니다. 성체성사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이 교차합니다. 첫째는 역사의 축입니다. 성체성사는 신비를 현재화하는 기억의 행위입니다. 둘째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하는 축입니다. (44항) * 첫째, 신앙은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므로 ‘하나’입니다. 신앙은 또한 한 분이신 주님, 예수님의 삶,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체적인 역사를 지향하는 것이기에 하나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육화의 구체적 사건을 관통하며, 하느님께서 그 몸 안에 당신을 충만히 계시하시기를 원하셨기에 신앙은 그리스도의 몸과 역사를 결코 초월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은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하나인 온 교회가 공유하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47항) * 신앙은 하나이기 때문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온전하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모든 조항은 상호 연관되어 있기에 가장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를 부인하면 전체가 약화됩니다. (48항) * 신앙은 하나의 여정일뿐만 아니라, 인류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건설과정으로 제시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계실 때 그들의 유대가 서로 얼마나 튼튼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은 믿는 이들에게 내적인 힘, 곧 항구한 확신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도 빛을 비춥니다. (50항) * 신앙은 하느님의 근원적 사랑을 만남으로써 생겨나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 삶의 의미와 선함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신앙은 세상을 멀리하지 않으며, 현대인의 구체적인 관심사에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인간관계의 궁극적 기초와 최종 운명을 하느님 곧 하느님의 사랑에서 파악하기에 인간관계의 구조를 이해하도록 해줍니다. 신앙은 모든 이를 위한 선물, 곧 동동의 선물입니다. 신앙은 우리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으로써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향하여 아아갈 수 있게 합니다. (51항) *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고통이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겨 드리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고통은 신앙과 사랑이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압니다. 죽음은 성부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네 고향을 떠나라”(창세 12,1), “오너라”라는 마지막 초대의 말씀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건거감의 순간에도 성부께서 우리를 굳건하게 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그분께 자신을 맡깁니다. (56항) * 신앙의 빛이 이 세상의 고통들을 망각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온갖 어둠을 다 몰아낼 수 있는 빛이 아니라 밤중에 우리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이며, 우리의 여정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이에게 모든 고통의 이유를 밝혀 주시지는 않지만 고통에 함께 하시는 현존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받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납득하게 할 수 있는 설명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는 현존의 방식, 그리고 빛을 향한 문을 열어 주기 위하여 그 고통의 역사와 연관된 선의 역사라는 방식으로 대답하십니다. (57항) * 어머니, 저희의 신앙을 도와주십시오. 그분의 사랑이 저희를 어루만지도록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신앙으로 저희도 그분을 만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특히 시련과 십자가의 순간에 저희 신앙이 성숙해져야 할 때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으탁하고 그분의 사랑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60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