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과 덕>, 세르베 핑케어스/이재룡, 한국 성토마스 연구소, 2023
* 정념(passio)은 감정이나 정서 또는 지속되는 정서적 상태를 말한다. 도덕적인 생활에서 정념은 이성과 법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 그에 맞서 싸워야 하는 비의도적인 감각 충동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념의 특징은 그것이 이끌어가는 지나침 또는 억제하기 힘든 느낌이다. (“덕과 정념”, 13)
* 덕은 정념들을 교정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바로 세우기도 한다. (“덕과 정념”, 14)
* 우리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쾌하거나 불쾌한 데에 따라,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 따라 자발적으로 매료나 배격의 반응을 촉발한다. 무관심은 우리의 느낌이 감동을 받거나 움직이지 않았다는 단적인 표지이다. 처음에 사랑은 느낌의 수준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 그것이 그 인격 속으로 퍼져 그로 하여금 노력을 요하는 갈망에 봉사하는 활동을 하도록 움직인다. (“사랑과 미움”, 28)
* 우리는 사랑의 폭압을 뭐라고 부를 것이냐는 문제 제기를 좋아한다. 사랑은 약속들로 충만하지만, 그것은 또한 나눔이나 공유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폭압적이기도 하다. (“사랑과 미움”, 30)
* 우리는 진리없이는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이해 없이는 의지를 실행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리의 빛을 잃어버린 사랑은 비틀거리고 타락한다. (“사랑과 미움”, 33)
* 도덕적 덕이 우리 안에 형성되고 우리에 의해서 실행되기 위해서는 감각적 사랑이 요구된다. (“사랑과 미움”, 33)
* 미움은 사랑의 부정적인 얼굴이다. 느낌들의 차원에서 그것은 등돌림, 짜증, 경멸, 불쾌감, 혐오 등의 형태를 취한다. (“사랑과 미움”, 33)
* 우리는 어쩌다 한 번 자비를 보이는 것에 대해 기뻐하지만, 자비가 필요한 대상이 되는 것은 싫어한다. (“자비와 동정심”, 35)
* 자비는 다른 사람들의 곤경을 봄으로써 야기되고, 질투는 남이 가진 것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자비와 동정심”, 41)
* 욕망은 육체와 영혼 모두에 연관된 어떤 쾌락을 위한 갈망,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념으로 이해된다. 욕망은 사랑에 의해서 야기된, 그러나 힘과 강도의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감각적 갈망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그것은 희망의 원천이다. 욕망은 흔히 감각적 갈망들의 충동들을 가리킨다. (“욕망과 희망”, 45)
* 영적인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오로는 욕망을 살로 된 인간에게 적합한 것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근본적으로 욕망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은총의 법과 신법을 거슬러 죄와 살 쪽에 정초된다. (“욕망과 희망”, 49)
* 쾌락의 결과들은 마음과 정신, 목마름과 갈망의 확장이다. 영적 쾌락은 이성의 사용을 선호한다. 쾌락은 인간의 활동을 완성하고 그것을 좀 더 강렬하게 만든다. (“욕망과 희망”, 57)
* 즐거움은 그 원인을 어떤 외부적 선에 두고 있는 데 반해, 기쁨은 내면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 기쁨의 원천은 인간 인격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우리의 추론과 자유로운 인격성에서 발견된다. (“쾌락과 즐거움과 기쁨”, 59)
* 육체적 고통은 내적 고통보다 관상에 더 큰 장애가 된다. 왜냐하면 관상은 특히 평온과 안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슬픔”, 69)
* 우리 삶속에 오직 즐거움만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에 머물렀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오로지 고통밖에 몰랐다면, 우리는 머릿속을 온통 두려움이나 벗어날 궁리로 가득 채우고 풀이 죽어 있었을 것이다. 즐거움과 고통의 교차는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를 피하고 다른 것 안에서 진보할 수 있기 위해서 천천히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고통과 슬픔”, 72)
* 고통의 오솔길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것은 우리가 상실하게 되는 것들보다 더 높은 선들, 내면적 선들에 대한 우리의 자유로운 수용에 의해 획득하게 되는 성질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이 수용, 우리 앞에 열리는 길에 말려듦은, 우리의 심층부에 있는 새로운 존재, 우리의 영적 존재를 깨닫게 해준다. 영적 존재에 대한 경험은 우리가 덕을 쌓는 진보에 따라 형성된다. (“고통과 슬픔”, 73)
* 고통은 기쁨을 정화하고 특히 그것을 외적인 즐거움을 넘어 우리가 심중의 존재, 곧 감각들의 동요나 악습들의 공격과 현혹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끌어올림으로써 기쁨에 기여한다. (“고통과 슬픔”, 74)
* 사랑은 우리를 촉발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평가하는 법을 가르치고 우리를 존재로 부르는 참다운 사랑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정신과 마음이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통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과 슬픔”, 75)
* 침묵은 우리가 이성적 존재자들인 한에서 어떤 고유하게 인간적인 행위, 곧 말의 발설과 관계가 있다. 침묵의 문제는 오늘날 세계에서 대중을 위한 소통 수단이자 우리에게 가용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대중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차원을 띠게 되었다. (“침묵의 덕”, 83)
* 낮과 밤의 경우에서 보듯이 활동과 교차되는 것으로서 침묵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는 점에 주목하기로 하자. 우리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힘을 재충전하기 위해서 밤의 침묵 속 휴식을 필요로 한다. 침묵은 ‘텅 빔’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활동과 사고 차원에서 만큼이나 생리학적 차원에서도 생명 전개과정의 한 양식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밤이 분별력을 가져다 준다는 것, 수면 자체가 우리 정신 속에 흥미로운 생각들을 솟아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밤의 침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결실이 풍부하다. 하지만 그 작용은 어둠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것처럼 우리에게 가려져 있다. (“침묵의 덕”, 84)
* 말은 오로지 침묵이라는 배경 위에서만 들릴 수 있고, 다시 포착되기 전에 반드시 침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발설하는 각각의 단어는 그것을 구성하는 소리에 의해서 다른 단어들과 구별되지만, 또한 그것들을 가르는 다양한 침묵의 길이에 의해서도 구별된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듣는 이들의 침묵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의 말들이 효과를 내지 못하고 허탕을 칠 것이다. 우리는 침묵이 말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라는 양쪽 끝에서 감싼다고 말할 수 있다. (“침묵의 덕”, 85)
* 침묵은 바로 말의 원천에 있다. 그래서 지혜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지간에 침묵 속에서 즐거움을 취한다. 신앙은 우리에게 가장 깊고 가장 높은 말씀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장 큰 침묵을 요구한다.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침묵은 언제나 말씀에 수반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말과 모든 인간적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정점에 이르게 된다. (“침묵의 덕”, 87)
* 덕이 우리 안에서 꼴을 갖추고, 우리 활동을 지도하고, 우리 자신의 것이 되고,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성찰의 침묵안에서 우리의 조심스런 경청을 필요로 한다. (“침묵의 덕”, 89)
* 수도원은 우리를 제도화된 침묵으로 인도한다. 침묵은 참으로 공동체 생활의 올바른 질서를 유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여, 기도를 보장하고 관상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수도생활에서 침묵의 자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관상생활의 중요성과 더불어 자라난다. (“침묵의 덕”, 93)
* 분노는 각자의 기질에 따라 다양하며, 다른 정념들보다 더 우리를 뒤집어놓기 때문에 불에 비교할 수 있다. 분노보다 증오가 훨씬 더 악한데, 증오는 분노가 하듯이 정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악을 그 자체로 원하기 때문이다. (“분노와 덕”, 103)
* 분노는 그것을 촉발하는 슬픔에 반대되는 일종의 즐거움을 수반한다. 앙갚음의 희망에서 야기된 이 즐거움은 일단 그 앙갚음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치게 된다. 분노는 어떤 다른 정념보다 이성의 사용을 저지한다. 그것은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고, 심한 경우에는 침묵에 빠드릴 수도 있다. (“분노와 덕”, 104)
* 성 토마스는 자신의 손으로 일해야 할 네 가지 이유를 열거한다. 자신의 생활비를 벌기. 많은 악의 원천이 되는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속죄의 실행으로서 욕망을 제어하기. 자선의 한 수단. (“일과 덕”, 127)
* 습성(habitus)은 우리가 올바르고 점점 더 낫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지속적 자세를 형성하는 것이다. (“일과 덕”, 132)
* 우리의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없다. 하느님이 그것을 우리 안에서 시작하는 분이고, 그 스승이시기 때문이다. (“일과 덕”, 134)
* 기도는 영혼 깊은 곳에서 정신과 마음의 차원에서, 모든 노력의 근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기도가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하여 우리 삶 안에 개입하게 만들고, 우리가 그분의 모범을 따라 일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과 덕”, 135)
* 피에르 다코의 <근대 심리학의 놀라운 승리>에서 심리학은 정상적이고 비정상적인 인간 행위의 모든 형식에 대한 학문 또는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심리학의 목표는 인격 완성에 유익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균형의 달성이다. (“심릭학과 덕”, 151)
* 사랑의 체험은 우리가 보고 느끼는 방식을 크게 변화시킨다. 이 경우에 기도는 우리의 활동을 사랑하는 사람고 연결시킴으로써 행동 능력을 강화하고 발전시킨다. 사랑과 우정의 체험은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쓸모없는 종의 쓸모에 관하여”, 159)
* 신앙은 우리의 기도를 변화시킨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활동과 우리의 활동이 하나로 일치된다. 기도가 하느님 앞에서 비밀스럽고 수동적일수록 그것은 남들을 대신하는 우리 활동에서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이 될 것이다. 예수의 기도는 그의 활동에 앞서고 그에게 인간적 능력을 능가하는 힘을 제공한다. (“쓸모없는 종의 쓸모에 관하여”, 161)
* 문을 닫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넘는 것으로 고양하기 위하여 외부 세계와 자신의 생각에 대해 육체적 눈과 정신을 닫고, 그것들이 우리 마음속의 비밀들을 보시며 우리를 당신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분 자신의 비밀로 인도하시는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는 데서 성립한다. 기도는 그 핵심에 있어서 관상적이다. 순수하게 하느님을 바라봄이고, 우리 자신에게 그러하듯이 그분의 존재에 친숙해짐이며, 아버지로서의 그분의 성질에 그리고 그분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조건에 익숙해짐이다. (“쓸모없는 종의 쓸모에 관하여”, 162)
* 기도의 첫걸음은 우리 자신이 홀로 하느님을 마주하고 그분 앞에서 우리가 쓸모없는 종임을 인정하는 비밀스런 장소에서 침잠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쓸모없다는 것을 앎으로써 우리는 결실 풍부하고 모범적인 일들에 기여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서 쓸모있게 된다. (“쓸모없는 종의 쓸모에 관하여”,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