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는 이미 신앙을 받아들인 기성 신자들뿐만 아니라 신앙 입문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내가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관한 모든 것을 신앙 입문자 교육에 가장 알맞도록 진술'하자는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제1부 서문)
* 나는 신앙 입문자들이 여러 잡다한 저술들 때문에 상당한 곤혹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익하고 불필요한 문제, 세부 문제, 논술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배워야 하는 내용들이 적절한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어떤 책이나 심지어는 학자들 사이의 논쟁이나 주석에 필요한 내용들까지 무분별하게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같은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은 입문자들에게 혼란과 지겨움만 안겨줄 뿐이다. 나는 이런저런 불편을 제거 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탁해, 거룩한 가르침을 가장 '간단하고 명료하게' 논술하도록 해보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제1부 서문)
* 거룩한 가르침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다루어지는 것들이 하느님 자신이거나 혹은 그 원리와 목적으로서의 하느님께로 질서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참으로 이 학문의 주제다. (I,q1,a.7)
☞ 성 토마스는 '거룩한 가르침(sacra doctrina)'을 우리가 '신학(theologia)'dmf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우리가 믿는 다른 여러 진리들과 연관시킴으로써 근거 있는 지식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지 묻는다. ... 이 전만에서 볼 때, 신앙의 진리들 사이의 상호관계는 하느님을 근본 원리로 삼는 지식 체계로 조직화된다. 하느님 자신이 신학의 첫 주제로 제시되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분께 대립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분께 의존하고 그분에 의해서 설명된다는 의미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장 피에르 토렐/이재룡,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024, 32-33)
* 사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증명하기 위하여 설득력 없는 논거들을 도입할 때는 불신자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즉 그들은 우리가 그런 논거에 근거하여, 그런 논거들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에 속하는 것들은 권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권위를 통하여 입증하려고 시도되어야 한다. 하지만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선포하는 것이 불가능하 것이 것이 아니라고 변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I,q 32,a.1)
*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 여기서 모상이란 '지성과 자유재량,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통제력을 갖춘 존재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원형'이신 하느님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합치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부터 유래된 모든 것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그분의 모상인 인간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다. 인간은 바로 자유재량과 행동 통제력 덕분에 자기 행위의 원리인 것이다. (I권 2부 서문)
* 성 토마스는 활동과 관련된 영혼의 능력을 규정하는 '내적 원리들'을 검토한다. 이것은 '습성'이라고 물리는데, 이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습관 habitus)'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 두 단어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습관'이 어떤 고정된 역학기제 또는 하나의 '루틴'을 가리키는 데 반해, '하비투스'(습성)는 그것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그 실행에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는 기관 또는 능력을 완성하는 어떤 창조적인 역량이다. 본성(natural)과 그 활동(action) 사이의 중간에 있는 '습성'은 본성의 충만한 만개이자 표현이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장 피에르 토렐/이재룡,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024, 46)
* 먼저 세 가지 대신덕에 관해 논한 다음에 이어서 사추덕에 관해 탐구할 것이다. 지성적 더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추덕 가운데에서 만나게 될 현명(prudentia)이다. 그리고 기예(ars)는 행위들을 다루는 윤리에거 벗어나 있다. 기예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제작 가능한 것들에 대한 올바른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세 가지 지성적 덕인 지혜(sapientia), 이해(intellectus), 지식(scientia)은 성령의 선물과도 그 이름이 일치한다. (II-II, 서문)
* 현명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덕이다. 왜냐하면 잘 산다는 것은 잘 행동하는 데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살기 위해서는 단지 무엇을 행하는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한다. 곧 그는 단순한 충동이나 정념에서만이 아니라 올바른 선택에 따라서도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택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과 연관되기 때문에 선택의 올바름은 필시 두 가지 요인, 곧 마땅한 목적과 그 마땅한 목적에 적절하게 질서 지어진 수단을 포함하고 있다. ... 그렇지만 인간이 자신의 마땅한 목적에 올바르게 질서 지어지기 위해서는 인간 이성의 습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태세를 갖출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목적으로 질서 지어진 것(수단)에 관계되는 숙고와 선택은 이성의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보완하고 그것을 이 일들에 잘 적응하도록 만드는 데는 어떤 지성적 덕이 필요하다. 이 덕이 바로 현명이다. 그러므로 현명은 훌륭한 삶을 사는데 꼭 필요한 덕이다. (I-II, q 57, a.5)
* 그리스도는 구체적인 인간 본성을 취했기 때문에 고통을 겪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통스런 감정에 예속되어 있기도 하다. 성 토마스는 그리스도가 자발적으로 고통과 죽음을 겪었지만, 그가 그것들에 예속되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고통과 죽음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장 피에르 토렐/이재룡,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024,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