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어떻게 알 수 있나?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있고,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고, 묵주기도를 하고, 고해성사를 보고, 보속과 희생을 하고, 애덕을 실천하고... 이런 외적인 행위를 보며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으리라. 이런 것들이 생활속에 스며들어 있고, 내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행위는 전인적인 회심 체험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하지만, 회심 체험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회심 체험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인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면서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할만 한 때가 있었나 되돌아 본다. 그런 때가 있었다라고 자신감있게 말 할 수 없다. 교회의 다양한 전례에 참석하면서 마음이 뭉클할 때가 있었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마음이 편해지는 때가 있었고, 신앙진리에 대해 약간의 빛을 받았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 뿐이다. 그런 순간이 종교학자들과 영성가들이 말하는 ‘두렵고 떨리는 매혹적인 순간’의 그림자일지 모르지만.
우리 각 개인의 믿음의 여부에 대해 우리 자신이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대인 하느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라고 응답한 것처럼. ******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혹은 내 삶이 어떻게 되는가. 그분께서 복은 내리신다는 것을 믿는가. 내가 기도하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실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느님을 내가 바라는 것을 해 주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는가. 믿음으로 삶의 애환과 고통이 줄어드는가. 믿게 되면 자유로워지고, 실제적으로 자유로워졌는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어떤 이미지를 하고 있는가.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믿음이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믿음은 마술과 같은 것인가. 언제부터 믿음이 시작되는가. 한 번 믿어 볼까라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믿음과 관련된 의구심에 대한 답은 어디에서 얻는가. 유아적인 믿음인가, 아니면 성숙한 사람의 믿음인가. 체화된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믿음인가. 예수의 삶에 대한 믿음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인가. 올바른 믿음은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만 하는가. 믿는다는 것이 미래에 대한 긍정이고 낙관인가, 과거에 대한 받아들여짐인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분을 하느님이라고 하는가. 믿음과 관련된 질문과 의구심이 모두 풀린 다음, 믿음에 대한 고백과 선포를 해야 하는가. 믿기 때문에 이 삶을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와 동기가 있었던가. 잘못되고 미숙한 믿음이 바로 잡혀지는가.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꿈을 꾸듯이, 각 사람의 믿음 또한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질문과 의구심을 드러낸 다음에는 뭐가 있을까. 질문과 의구심에 대한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사람들은 언제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나. 단순하고 유치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질문들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모든 질문을 괄호속에 가두어 놓고 지낸다면 어떻게 될까. 믿음이란 공기와 같아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느 것이다. 누구를 믿고 어떤 것을 믿고 그 이전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믿음이란 돌을 빼내버려도 세상은 그대로 유지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보는 세상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보는 세상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