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그리우스는 영성생활의 여정을 수행과 영지로 나눈다. 앞은 것은 활동에 해당하고 뒤의 것은 관상에 해당한다. 수행은 육체에서 오는 정념의 정화를 목적으로 한다. 영혼을 어지럽히는 내적 세력과 소음들, 그것들의 원인이 되는 '마귀'들과 벌이는 영적 투쟁이 바로 수행이다. 수행자가 제일 먼저 마주치는 내면의 적은 탐식이다. 그 다음이 성적 탐닉이며, 소유욕이 그 뒤를 따라온다. 이 세 가지는 육신을 지닌 모든 존재가 기본적으로 지니는 욕망이다.
다음으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이것은 앞의 욕망들을 채우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이나 무력감과 관계가 깊다. 이 슬픔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타인들과 비교하면서 생기며, 슬픔 이면에 시기와 질투가 자리잡고 있다. 그 다음으로 오는 것은 분노다. 욕망을 원하는 대로 채우지 못할 때 슬픔의 시기가 지나 분노가 치밀게 된다. 이 뒤를 잇는 것이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아케디아'이다. 권태, 절망, 무기력, 우울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수행자를 위기 상태로 이끈다. 다음에 오는 것이 허영 혹은 공명심이다. 자기의 역할이나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믿게 하여,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집착하며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전전긍긍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이 교만이다. 자기를 모든 이의 위에 두고 세상의 중심에 둔다. 그래서 항상 남을 통제하고 지시하며 가르쳐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 여덟 가지 악한 생각에 관한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이 요한 카시아누스를 거쳐 '칠죄종'의 교리로 확립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영적 투쟁의 수행결과 도달하게 되는 지점을 '아파테이아'라고 한다. 내면의 애착이나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이며, 여기서 참된 사랑의 능력이 꽃피게 되며, 이곳이 영지가 시작되는 점이다. 정화된 마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다. 이 관상의 여정은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는 단계를 지나,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 한가운데서 신성을 직접 뵙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 마지막 단계를 '테올로기케'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테올로지아(신학)는 지성적 작업을 뛰어넘어 영성생활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게 된다. "그대가 신학자라면 그대는 진정 정녕 기도할 것이다. 그대가 정녕 기도하고 있다면 그대는 신학자다." (《내가 사랑한 교부들》,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이연학), 한국교부학연구회, 분도출판사, 2005, 249-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