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방법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사회적 용서’를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화해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화해를 증진할 임무가 사회에 있다 하여도, 아무도 사회 전체에 화해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사회와 사회 정의가 합법적으로 처벌하려 하여도, 누군가는 자유롭고 너그러운 결단으로 처벌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령으로 상처들을 싸매거나 망각의 외투로 불의를 덮으려고 애쓰면서 ‘전반적인 화해’를 선포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다른 이들의 이름으로 용서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자신이 입은 피해를 넘어설 줄 아는 일부 사람들이 지닌 용서의 능력을 보면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도 인간적입니다. 어떤 경우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잊어버리라는 말입니다. (246)
*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앞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제발, 그러면 안 됩니다! 기억이 없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온전하고 명료한 기억이 없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집단 양심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다른 세대들에게 그 사건의 참상을 증언합니다. ...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희생자들 자신은 그들이 겪은 커다란 악행 때문이라는 명목으로 보복과 온갖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논리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공포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비참하고 부패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었던 사람들, 크고 작은 몸짓으로 연대와 용서와 형제애를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언급합니다. (249)
* 용서는 망각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 참으로 용서하는 사람들은 잊지는 않되, 그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파괴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악순환을 깨고 파괴의 힘이 기승하는 것을 막습니다. (251)
* 우리는 면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의는 오로지 정의 자체에 대한 사랑, 희생자에 대한 존중, 새로운 범죄의 예방, 공동선의 수호를 위한 적절한 방법으로만 추구됩니다. 정의는 개인적 분노의 표출로 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252) ************
* 10년 전 4월 16일, 오전 9시부터 모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휴식하는 동안에 <세월호>에 대한 긴급 뉴스를 접했습니다. 단순한? 사고처럼 보였던 것이, 몇 분 사이에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끝이 쭈뼛서고 그냥 눈물이 흐르는 사고로 바뀌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너희들과 그들 사이에, 개인과 사회 단체와 국사 사이에, 씻으래야 씻을 수 없는 깊고 깊은 상처와 기억을 남기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와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되돌아보고 기억하면서 인간의 약함과 사악함, 우리 삶을 뒤흔들어놓는 어둠의 세력과 이것을 은폐하면서 어둠이 증식되게 방치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하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열고 이념, 언어, 문화,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소서. 하느님, 저희 모두에게 하느님 자비의 기름을 부어주시어, 과오와 오해와 다툼으로 입은 저희의 상처를 치유해 주소서. 또한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겸손하고 온유하게 평화 추구의 험난하지만 풍성한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모든 형제들> 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