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여인아, 왜 우느냐?”
오래전에 보았던 흑백사진 한 장이 생각납니다. 만들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흙으로 덮힌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 무덤 옆에서 30대로 보이는 한 여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즐겨 찍었던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무덤에 묻힌 사람과 어떤 관계였을까. 언제 세상을 떠났을까. 죽은 사람에 대해 어떤 기억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생각하며 울고 있을까. 언제까지 울고 있을 것인가. 아직 살아남아있는 자로서 어떤 걱정을 하고 있을까.
그리스도교는 무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죽어 묻혀 있어야 할 그 사람의 빈무덤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음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태초에 창조되었던 세상이 다시 시작된 곳이 빈무덤임을 믿고 선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란 빈무덤에 대한 목격증인들의 증언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무덤가에 주저 앉아 울고 있었던 한 여인과 예수님의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던 마리아. 이들이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것은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자기와 함께 살아있음을 깨닫을 때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죽음과 그에 대한 울음과 빈무덤이라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을 넘어서는 면을 함께 갖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