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쓴 것까지도 배우는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이름난 배우를 쓰는 이유 아닐까요? 나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대사를 백번도 더 읽습니다. 아흔아홉 번째 했을 때는 몰랐던 것을 백번째 했을 때 느껴지는 것이 있으니까. 읽을수록 느껴지니까 대본을 계속 읽고 싶어집니다. 계속 새로운 것이 찾아지니까 다른 것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면 꼭 보입니다. 처음부터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냥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런데 예민한 눈을 가진 사람은 어제 그 배우의 연기에서 느꼈던 것과 오늘 느끼는 것이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같은 배우가 나와서 같은 대사를 하니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더 깊어져 있습니다. (<생에 감사해>, 김혜자, 34-35)
☞ 글을 쓰는 사람이 누구든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가가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글로 글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도 있다. 글을 쓰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글은 이렇게 부족한 상태에서 세상에 나가게 된다. 이렇게 부족한 상태의 글을 만난 독자 중에는 그 글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일차적으로 작가가 의도하고 있었던 것을 놓치는 경우도 많지만. 배우 김혜자가 받아들였던 대본도 똑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연극 대본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 그것을 배우 나름으로 해석한 다음에 연기로 드러난 것, 배우의 연기를 본 관객이 느끼고 체험한 것이 있다. 보이지 않지만 굳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이 일체감으로 '잘 된 연극'으로 될 것이다.
배우가 대본을 수없이 읽는 태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 때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수없이 읽고 읽으면서 그 말씀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게 된다. 말씀을 읽는 사람의 처지이에 따라 다르게 다가가는 것이 말씀의 특징이다. 음악의 주된 선율이 있지만 그것이 변주된 상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 똑같은 말로 강론한다고 해서(그런 경우가 있을 지 모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똑같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말씀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하는 경우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에도 듣는 사람은 금방 알아차린다. 독자의 처지에 따라 텍스트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듣는 사람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도 말하는 내용이 아주 다르게 다가갈 것이다. 이 처럼 어떤 텍스트와 그 텍스트와 관련된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이 복잡함을 견디어 내는 것이 텍스트(대본, 하느님 말씀)을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