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수도회 전통에는 기본 가르침이 있다. "수도자가 할 일은 함께 우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의 아픔에 함께 '울어야 하는' 일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도 수도자가 진리 편에 서서 외치는 일이 금지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교회의 무감각에 날카로운 통찰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 나는 순교자가 아니다. 다만 이 시대의 합리적인 문화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을 포기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렇다면 수도자로서 순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포기해야 하는가? 침묵을 위해서인가? 침묵은 억압과 불의, 공격과 착취와 전쟁으로 내모는 힘과 공모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내 서원생활의 일부인 침묵의 공모가 정직하고 의식적인 반대보다 더 큰 선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프다. (<토마스 머튼의 시간>, 1964년3월 3일)
☞ 수도자들은 자기 검열에 능하다. 공동체와 장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청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생각과 말씀에 대한 충실성보다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의 반응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머튼은 일반 수도자들과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공동체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혼자서만 머물 수 있는 '은수자 집'을 요구했던 것을 이기심과 자애심이라고만 보지 않고, 자기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대부분의 수도자들이 공동체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데, 머튼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핵전쟁에 대해 이미 잡지에 기고한 것을 재출판할 수 없다는 결정을 그가 한 순명서원으로 그대로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