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한 가운데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좋아하는 학생 때 심었던 은행나무 그늘이다. 양손으로 감싸 쥘 수 있어던 나무였는데, 지금은 양 팔을 벌려서도 안을 수 없다. 얼추 계산해 보니 45살 정도 되었다. 축대를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형제들의 말때문에 잘려나갈 위험에 처한 적이 있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뿌리가 축대를 무너뜨리게 할 수 있겠지만, 뿌리가 흙을 단단하게 잡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은행나무 바로 옆에 좋아하는 단풍나무가 있다. 이것도 학생 때 심었던 나무다. 건물과 너무 가까이 심어 사람들의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가지가 몇 차례 잘려 나갔다. 그럼에도 의연하게 서 있다.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다. 축대 아래에 좋아하는 느티나무가 몇 그루 있다. 이 나무는 수도원 앞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아파트 회사에서 땅을 매입하여 쪽 공원을 만들어 시에 기증할 때 심은 것이다. 3-4미터 높이 되는 축대보다 몇 배 더 자랐다. 느티나무와 더불어 소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활엽수들 때문에 자라는데 애를 먹고 있는 것 같다. 정원에 있는 나무들과 주변에 있는 나무들의 그늘로 여름에는 이곳이 덩달아 시원하다. 나무 그늘 아래에 있을 때는 더위를 모른다. 바람부는 것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확실히 알 수 있다. 몸으로 느끼는 시원함과 눈으로 보여지는 시원함이 함께 하기 때문에 한결 시원하다. 바람이 없을 때는 나뭇잎의 움직임없음과 더불어 도시안에서 고요와 침묵속에 머물 수 있다. 침묵이 움직임 없음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돌과 건물과 폐허를 언급하는 이유다. 도시 한 가운데의 침묵을 뚫고 조금 아래 한길에서 오가는 차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공사를 하고 있는지, 요란한 기계소리가 들린다. 이런 소리들이 침묵과 고요를 깨지 않는다. 삶의 소음이 침묵안으로 스며들고 침묵안에서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의 고요와 침묵. 그 안에 머물며 영원에 대해서 상상한다. 영원이란 어떤 순간이 지속되는 것인데, 상상안에서만 가능한 시간 개념이다. 몇 년 전, 이곳에 살면서 보았던 주변 환경이 비슷하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