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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 낮과 밤생활글/생활 속에서 2022. 1. 30. 11:42
달빛도 별빛도 없는 칠흑의 어둠은 자신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모르게 만든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동시에 그런 상황에 놓이면 인간의 뇌에서는 즉시 센서가 발동하여 청각과 촉각과 후각이 잠들어 있던 능력을 활짝 펼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나지 않던 냄새가 나고, 베겟니의 미세한 주름을 목덜미로 느낀다. (<생의 실루엣>, 미야모토 테루/이지수, 봄날의책, 2021, 39)
☞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다. 청주시 근처 청원군 어느 교육센터에서 모임을 하고 있었다. 그 건물 지하인가 옆인가에 상당히 긴 지하터널이 있었다. 그 건물 공사하면서 생긴 지하터널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함께 교육받고 있는 사람들이 그 지하터널을 통과하면서 어둠을 체험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지하터널 입구의 문이 닫히고 어둠속을 걸어서 다른 출구까지 가야만 했었다. 햇빛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전등이나 촛불 등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옆에 동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그 어둠을 빠져나기가 위해 소리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밖에 남지 않았다. 서로 교환하는 정보라는 것은 고작해야 지하터널 벽을 더듬거리고 신발 아래의 감각으로 알아낸 지하터널의 상태에 관한 것 뿐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리고 얼마나 먼 거리를 걸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겪었던 일을 기억하면 지금도 황당하다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과 함께 가끔 칠흑같은 밤의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때가 있다. 일부러 밖이 가장 어두운 때를 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둠속으로 들어갈 때 어둠에 익숙해져 있지 않는 시신경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짧은 시간이 있다. 빛이 있었던 때를 기억하며 그 감각으로 앞으로 나가려다 주변의 나무에 부딪히거나 배수로에 빠지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어둠속에 그대로 서서 주모경을 두세 번 욀 정도로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둠에 눈이 익었을 때 조금씩 걷기 시작하지만, 빛이 있었던 낮고 아주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시각은 죽거나 줄어들고, 신체의 다른 감각들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더구나 넓은 길이 아니라 어둔 숲속을 걸을 때는 시각보다는 손발의 촉각에 많이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어둔밤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청각이 예민해짐을 알 수 있다. 나뭇잎이 밟히는 버스럭 거리는 소리와 자기를 헤칠지도 모르는 곤충과 야생동물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후각이 예민해진다고들 하는데, 평소에 후각이 둔한 나로서는 그것에 대해 자신있게 말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어둠속에서 신체가 반응하는 것을 보아 후각 또한 예민해지리라 생각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밤의 어둠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몸으로 느껴보는 것은, 그 시간만이라도 사람이 전인적으로 살아보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하루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 어둠속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을 때가 있다. 창문에 암막 커텐이 쳐져 있어 칠흑같은 어둠속에 있는 것이다. 다른 곳에 살고 있었을 때, 창문으로 들어온 가을 달빛이 좋아 한동안 누워 있다가 잠든 적이 있었지만, 이곳 산골의 적막함과 방안의 어둠 또한 몸과 마음을 쉬게 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살면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낮 시간의 감각적인 것들이 죽거나 가라앉는 이런 밤시간과 어둠의 시간을 통해 지금까지 죽어있었던 영적인 감각이 조금씩 살아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의 절반은 낮시간이고 절반은 밤시간이다. 이런 시간이 교체되고 반복되면서온전한 사람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것은 꼭 내적인 상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현실적인 삶 안에서도 낮과 밤이 오가고 낮과 밤의 시간을 교대로 살아가면서 건강한 사람으로 되어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