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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풍헌이 말했다. 섬에 글 읽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시겠구려. 창대라는 아이가 글을 좀 읽는데, 정 선비한테 말벗이 될는지도 모르겠소... 창대는 크고 맑은 눈으로 상대방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표정이 조카사위 황사영과 닮아 있어서 정약전은 흠칫 놀랐다. 사람은 피가 섞이지 않아도 닮을 수가 있구나. 맑음의 바탕은 같은 것이로구나. 창대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정약전은 잔을 들어서 깊이 마셨다. 술이 몸을 찔렀다. 마주 앉은 창대의 얼굴에서 또 조카사위 황사영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섬에도 황사영이 있었구나. 서울의 황사영은 죽었을까. 참수(목을 벰)였을까 교수였을까. 효수(죄인의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아 놓음)였을까 능지처참(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 죄인을 죽인 뒤, 사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내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이었을까. 기시(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형벌)되었을까 달아났을까. 처자식도 죽었을까. 황사영을 떨쳐내려고 정약전은 거푸마셨다. 창대를 부르는 날 밤에 정약전은 늘 취했다. (<흑산>, 112-117)
☞ 흑산에 머무르면서 천주님에 대한 정약전의 생각은 어땠을까. 천주님에 대한 생각과 믿음이 마음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천주님으로 해서 자기 자신과 동생 약종과 약용 그리고 처조카 황사영이 감당해야만 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몸과 마음속 깊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천주님께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살아있었던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이고, 그가 살면서 만났던 모든 사람과 겪었던 모든 일들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주셨을 것이다. 유배된 자의 슬픔, 삶에서 배제된 자의 슬픔, 가족들에 대한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자의 슬픔, 다시는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자의 슬픔이 그의 마음속에 지층처럼 쌓였을 것이다. 약전은 창대에게 투영된 조카사위 황사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끼는 마음, 대견한 마음,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항상 그늘이 있었던 애틋한 마음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