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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죽은 정약종과 가을에 살아남은 정약용은 똑같이 단호했다. 둘은 정약전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서 이 세상 너머를 엿보았다. 그때 세상의 근원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제 갈 길을 갔다. 그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돌이키지 않았다. 형틀에 묶여서, 두 동생과 조카사위 황사영의 맑은 얼굴을 생각하면서 정약전은 기진맥진하였다. 두 동생이 서로 보이지 않고 서로 불러도 들리지 않는 먼 자리로 갈라지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약종이 사학의 죄를 끌어안고 먼저 죽어서 약용은 풀려나기가 수월할 것이었다. 약용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약용은 자신이 약종의 죽음에 기대로 있음을 알았다.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되었다. 정약전은 약용의 배교에 힘입어서 함께 풀려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약전도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되었다. 정약전은 약종과 약용으로부터 비켜 서 있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죽은 약종과 황사영의 일을 평생 입에 담지 않았다. 그들은 형틀에서 헤어졌다. 졍약종은 참수되었고 황사영은 능치처참되었다. 집행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정약종의 사체는 두 토막이었고 황사영은 여섯 토막이었다. (<흑산>, 140)
☞ 다시 소설이다. 두물머리에서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형제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꿈을 꾸었을 형제들. 그렇게 살면서 굳게 다져졌던 미래 삶에 대한 확신. 꼭히 천국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현실보다 조금 나아진 삶을 그리며 살았을 행복한 시간들. 그리고 저마다의 길을 간다. 마음속에 밖으로 꺼내어 볼 수 없고 말할수 없는 어둡고 어둔 기억을 간직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유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끈적끈적한 삶. 그분들이 있어 삶이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고뇌를 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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