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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살이생활글/생활 속에서 2020. 11. 16. 16:15
이곳은 하루가 일찍 시작한다. 7시 30분에 아침식사다. 보통 때보다 약 30분 앞 당겨진 것 뿐인데, 아주 빠른 것처럼 여겨진다. 식사 후 바로 산책을 했다. 안개 자욱한 산길을 걷은 것이 좋았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냥 앉아 있는 것 뿐이다.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덜어내면서, 묵상해야 할 주제가 떠오르면 그것에 대해 마음을 모으고 있을 뿐이다. 무엇을 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사 독서의 말씀에 대해 잠깐 집중했다. 처음의 사랑을 저버렸다다고 질책하는 말씀이다. 첫 사랑, 첫 결심, 첫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기가 쉽지 않다. 변했다라고 말할 수 있게지만, 따라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가 어디서 추락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도 있다. 추락한다, 있었던 자리에서 아래 깊은 곳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윤리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타락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추락과 타락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살다보면 그런 때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때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자신의 삶에 대해 묻게 되고, 첫마음 첫사랑과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런 자각과 더불어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묵시록에 나와있는 이 말씀과 복음에 나오는 예리고 소경에 관한 이야기는 맥을 같이 한다. 그가 어떤 연유로 앞을 못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태생 소경은 아닐 것이다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소경의 말을 통해서 그가 전에는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겠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묵시록에 나오는 타락한 사람, 추락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이다. 성경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하려고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말씀을 왜곡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스쳐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놓아두어도 된다.
이곳에 묵주기도 할 수 있는 산책길이 있는데, 그 길을 기도하며 걸었던 적은 없었다. 점심 식사 후에 기도하면 그 길을 걸었다. 환희의 신비를 마치고 이어서 빛의 신비가 이어지고 있었다. 빛의 신비가 예수님의 공생활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그런 순서가 타당하다고 여겨졌다. 빛의 신비가 가장 나중에 나오긴 했지만.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한 인간으로서 겪었을 고통에 관한 신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고통을 대신 지고 가신 측면도 있지만, 육화되신 분이시기에 한 사람이 살면서 만나게 되는 고통을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겪고 있는 것을 나타낸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창조와 진화에 관한 이야기도 떠올랐다. 진화는 창조된 후의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다. 진화론자들은 비생물체에 관한 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창조는 이 세상에 감각적인 것이 어떻게 드러나기 시작했나를 다루는 분야다. 창조 후에 자연법칙을 따르지만 그 자연법칙의 이면에 하느님께서 계신다고 믿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창조에 관한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과학분야를 다루었던 오류가 있었다면, 지금은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창조와 진화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과학적인 관점과 용어로 종교와 관련된 창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교적인 눈으로 자연과학 분야에 대핸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물론 세계를 바라보고 삶을 바라보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긴 하겠지만.
영원으로부터 계신 분이 역사의 한 싯점에 들어오셨고, 미래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믿음과 관련된 것을 모두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지적 솔직함은 갖고 있어야 한다. 예수라는 분. 그분을 믿는다라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비신앙인인 형님이나 누님처럼 살고 있을 것이고. 그런 삶이 결코 잘못된 삶도 아니다. 삶의 양식이 달라졌다고 믿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런 삶을 먼저 택하고 믿는다라는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는가. 흔히 성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분이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이런 삶을 먼저 택했기 때문에 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분과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지금까지 그런 때가 있었던가 진지하게 진솔하게 묻는다.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 이 싯점에서 이 생활을 물리고 원점으롤 되돌아 가야 한단 말인가. 이런 고민은 이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혹은 시작하고 나서 몇 년 안에 한 번쯤 진지하게 해 보아야 했던 질문이다. 어떤 일에서든지 약간 느린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런 질문은 늦어도 너무 늦은 질문이다. 그래서 예수라는 사람은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고, 나를 불러주었던 사람이어야 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이어야 하며,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했던 사람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말하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들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고, 솔직한 말이기도 하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시간은 많지 않다. 모든 것을 시간속에서 해야 하는 사람인데, 초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