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수요 오전반기도.영성/다네이 글방 2020. 1. 17. 09:43
1월 17일, 금요일
수요 오전반 후기입니다.
고전읽기 <코스모스> 첫 시간. 8명 참석. 오랜만에 조촐했어요. 집안일, 여행, 불편한 몸 등으로 함께 못한 게 아쉬웠지만 괜찮습니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여기 지금 ‘창백한 푸른 점’ 지구별에서 공유하고 있으니까요.지난 가을 양양 낙산 바닷가에서 맨발로 춤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앞산 마루를 쳐다보며 언젠가는 하늘을 만져봐야지 꿈꾸던 산골 아이가 있었구요. 어린 시절 별을 바라보았던 아이는 ‘스텔라’가 되어 있습니다.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드디어 책 <코스모스>를 읽습니다. 시작이 반인데 6부까지 읽었으니 다 읽었다 퉁쳐도 되겠지요. 발가락 끝이라도 살짝 닿았다면 더 짜릿하겠지만 이미 항해를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듣는 재미도 참 흥미진진합니다.
칼 세이건은 물리학, 천체학 뿐 아니라 인문학자입니다. 이런 통섭이 바탕이 되어 좋은 글이 나왔지요. 각 장의 멋들어진 제목들이 주제를 잘 설명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우주 생명의 푸가’나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는 ‘협력’으로 이해됩니다. ‘진화론’과 ‘창조론’, 앎의 신비, 지구환경 문제도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도대체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별이, 태양이, 우주가 궁금했던 걸까요. 그 옛날부터 인류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내려 했다는 것 신기합니다. 나무 막대기와 그림자만으로 지구의 표면이 곡면임을 알아냈다는 것. 모든 생물은 하나의 기원에서 비롯되며 ‘우주는 하나의 물질공동체’랍니다. 나무와 ‘나’와 동물의 조상이 같다네요. 우리가 미처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무엇이든 탐험하고자 한다면 ‘회의의 정신과 상상력’은 필수인가 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은 우주와 같은 엄청난 주제를 다루기엔 너무나 짧지만 인간과 우주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연결돼 있다는데요. 하느님의 창조 사업 역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는 이미 진화론을 창조론의 일부로 수용했지요. 하느님은 우주를 넘어서는 분.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는 중요치 않아 보입니다. 불변의 진리인 하느님 아래 인간은 하느님 창조사업의 협력자이며 모든 피조물은 변화, 발전합니다.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동의하시나요? ‘신경’을 고백할 때 ‘천지의 창조주’나 ‘모든 성인의 통공’ 같은 대목에서 종종 멈칫합니다. 100억 개가 넘는 유기물질 중 생명을 만드는 것은 50여종. 우주 어디에서나 흔한 원소로 만들어진 인간이지만 0.01%의 서로 다른 100여개의 유전자 돌연변이들로 우리는 각자 고유하며 유일한 존재가 됩니다. 생명의 신비지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내가 믿는 하느님’의 자리 사이에서 의심이 계속됩니다. 허락된 의심이길 바랍니다.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나는 점점 작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머리에 이고 다니는 생각들’은 부질없고 무지랭이인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 긴 겨울밤을 뒤척입니다. 지구 밖을 꼭 알아야 하나 싶다가도 결국 이 모든 것이 나를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작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소중합니다. 외부 세계에 무관심한 채 ‘나’에 함몰되어 살 수는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나’를 더 사랑하고 ‘우리’를 더 잘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과 이해가 커지는 것이야말로 우주, 하느님의 신비로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언제 하늘을 보았는지 아득합니다. 하늘을 보고 달과 별을 봅니다. 햇볕 한 조각도 예사롭지 않고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다 만져주고 싶습니다. 여행지에서 남십자성을 보는 횡재, 실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 또한 힐링이 아닌가요.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저 높은 곳에서 내려주는 복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책 덕분이고 창조주 덕분입니다.
다음 모임은 2월 5일, 7~10부까지 읽고 이야기합니다. (위 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