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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요 오전반기도.영성/다네이 글방 2019. 12. 6. 17:16
12월 4일, 수요일
서울 수요 오전반 후기입니다.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로 책 나눔. 11명 참석.
글방에서 희곡을 읽기는 처음이었지요. 흔히 접하지 않은 장르. 더욱이 고전을 재해석한 희곡이라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습니다만. 어린 안티고네 때문에 내내 불편한 책. 모두 죽고 역시 죽음을 기다리는 크레온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기다리는 심정이 되었다면 과장일까요. 소포클레스보다 훨씬 더 고뇌하는 크레온과 더 어려진 안티고네, 신과 인간이 3대에 걸쳐 주고받은 비극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밥벌이와 향락에만 몰두하는 경비병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장 아누이는 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예언자는 아예 빼버렸지요. 2차대전의 한복판에서 신을 찾는 건 무리였을까요. 오직 인간들만이 ‘네’와 ‘아니오’로 대결하는 세상에서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합니다.신이 없는 세상에서 안티고네가 저항하는 대상은 세속적 삶, 공동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으로 보입니다. 헤겔은 안티고네를 ‘인간의식의 진보이자 도약’이라고 칭송했답니다. 국가와 권력, 법에 저항해 가족애, 양심에 따라 행동한 인물이란 뜻이라네요. 장 아누이가 안티고네를 동생으로 설정한 건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저항, 어린이다움의 순수함을 강조한 것이구요. ‘어린이다움’은 사실 신앙인인 우리의 지향이기도 합니다.
왕은 현실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반면 안티고네는 인간적 행복을 버림으로써 인류가 지향하는 고매한 인격으로 추앙받습니다. 실정법과 자연법, 그리스도의 길과 인간의 길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릴지는 여전히 큰 숙제입니다.
기원전 5세기 아마도 원형극장 같은 무대에서 극이 상연되었을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비극이 주는 교훈, 감동에는 특별한 위대함이 있답니다. 식민지와 군사독재 시절,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현실에 대항한 자유로운 영혼들도 기억납니다. 카드놀이를 하는 경비병의 모습에선 세월호 유가족 옆에서 피자를 먹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다는 뉴스도 떠오르구요. 집단의 무지, 몰염치, 병든 사회의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진실은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은 늙어도 ‘사는 게 너무 행복한 어른’보다는 ‘늘 새로운 정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경비병의 모습에서 나를 봅니다. 상상력이라곤 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모습, 통치자가 원하는 모습대로 ‘찾아내는 모든 것을 핥아먹고 있는 개’의 모습.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악의 평범성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허나 비극의 편리함에 휩쓸리고 싶지 않습니다. 일상의 작은 것들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변곡점, 기울기, 에너지. 그 중 하나만이라도 바꿀 수 있길 바랍니다. ‘네’라고 할 때의 상황이 모두 온전한가의 의문을 판관기 입타의 이야기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은 ‘네’로 인해 생기는 죽음.
매장은 신의 뜻, 버리는 것은 왕의 뜻입니다. 안티고네는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소포클레스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늙어가며 얻게 되는 하잘 것 없는 위안’을 위해 ‘못 본 체하며 누구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서양판 효녀심청.
유모나 경비병 쯤이 나의 위치일까요. 크레온에게서 부모의 모습을 봅니다. 자식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마음. 요양병원 간병인들은 환자를 돌볼 때 어느 선 이상은 돌보지 않는답니다. 눈 앞의 이익이나 해로움에 민감하다보면 더 큰 것, 더 먼 미래의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정의, 행복, 신앙 등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미래가 두렵다는 자식에게 당장 ‘밥’ 말고는 딱히 해줄 것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겨울왕국의 안나, 빨강머리 앤도 떠오릅니다. 안티고네처럼 행동하진 못할 거 같아요. 크레온은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히스메네는 심사숙고하는 언니구요. 좀더 온건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텐데. 여성성으로서 안티고네의 ‘애도’에 깊이 공감합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경건해야 하니까요. 출산의 경이로움을 아는 여성이야말로 죽음의 경건함을 증명해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념을 위해 목숨 바치는 삶은 당연히 존경하지만 일상에서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최근 계속 불편했던 모임을 그만뒀습니다. 막상 탈퇴하고 보니 유치하게 느껴집니다. 남아서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갈등 상황에서 직진하거나 타협하거나 기다리는 여러 방법이 있을텐데 지혜롭게 살고 싶습니다. 다행인 것은 글방이 점점 좋아진다는 겁니다. 책이든 사람이든 알게 되기 전과 후 조금씩 달라지리라 믿습니다.혁명을 위해서라면 ‘시체 냄새’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거대담론이 ‘개인’의 가치를 왜곡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디어에 의해 포장된 ‘개인’이 어느 한 쪽으로만 쏠려 있을 때 더 큰 가치가 무시되기도 합니다. 테베의 시민들, 전쟁의 상처를 털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시기에 도덕과 인간성만 주장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선량한 안티고네들이 오히려 변화를 막는다는 생각, 위험한가요? 물론 ‘애도’는 정말 중요하지만요.
문학적으로 아쉬운, 개운하지 않은 책이었어요. 희곡이라는 장르 탓인지. 아니면 이런 문제들을 논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탓인지. 왠지 하찮고 부질없어 보입니다. 주님의 수난이 ‘정해진 수동태’인 것처럼 ‘다 그런거지 뭐’라는 느낌도 있습니다. ‘저녁이면 지쳐서 헛된 일은 아닌지 자문하지만, 아침이 되면 일과를 시작하는 노동자처럼’ 사는 게 오랜 인간의 습(習)이 아닐런지요.
장 아누이는 카톨릭 신자였다고 합니다. 신적(神的)인 요소는 빼버렸지만 그래서 더욱 신적인 것을 찾게 됩니다. 한 국가나 사회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오롯이 하느님 백성’으로서 산다는 건 무얼지.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우리에게 무얼 바라는지. 불편하고 어려운 질문을 던져주는 책, 감사합니다. 다음 모임은 12월 18일입니다. (위 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