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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기도.영성/북앤샵 글방 2019. 10. 20. 22:12
나의 방랑
-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 -
『나의 방랑』,
아르튀르 랭보/한대균, 문학과 지성사
인터파크 명동점, 북앤샵 글방
2019년 10월 19일
이번 달 북앤샵 글방에서 함께 이야기할 책이 랭보의 시집 <나의 방랑>입니다. 왜 이책을 선택했는가? 가을이면 모두 시인이 된다고 합니다. 시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뭔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 비슷한 것이 들고 일어납니다.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책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나의 방랑-랭보 시집>을 만났던 것입니다.
제가 랭보를 처음 안 것은 2014년 8월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저는 <걷기>에 빠져있었습니다. 시간나면 걸었고, 시간이 없어도 시간 내서 걸었고, 날씨가 좋아고 걸었고 나뻐도 걸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걸었고, 울적하면 울적하다고 걸었습니다. 이러한 때 랭보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 때 어떤 글을 썼는가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 그는 자신을 그저 걷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가자! 걷기, 무거운 짐, 사막, 권태, 그리고 분노”라고 하며 평생을 걸었습니다. 시를 쓰면서 걸었고, 시를 쓰기 위해 걸었습니다.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것에 분노하면서, 자신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갈망하며 걸었습니다. 서른 일곱 살, 아픈 한 쪽 다리를 절단하여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으며, 여기도 가고 싶고 저기도 가보고 싶습니다. 난 보고 싶고, 살고 싶고, 떠나고 싶단 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나무토막과 같은 자신을 보며,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짐을 챙겨서 떠나야해”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당시 읽고 있었던 책이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었습니다. 자연히 시인 랭보가 아니라 걷는 사람, 방랑하는 사람, 외로운 사람, 순례하는 사람, 고집스럽게 걷다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랭보가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거죠. 그래서 그가 쓴 시를 몇 편 읽어 보았습니다만 어렵기만 하고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걷는 사람 랭보가 아니라 시인 랭보로 접근하게 된 것은 <나의 방랑>을 준비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이 준비를 하면서 제가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는 랭보의 산문시집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어렵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 읽고 나서도 ‘무슨 내용이었지?...’라는 생각이었고요. <나의 방랑>은 의무감에서 읽었습니다. <나의 방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한 사람이 안 읽을 수는 없잖아요. <지옥에서 보낸 한 철>보다는 조금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리송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음에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자료들을 읽었습니다. 주로 랭보의 시에 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랭보의 시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었고, 랭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랭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세상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클로드 장콜라라는 사람이 쓴 랭보의 전기입니다. 두툼한 두 권으롤 된 천 페이지 되는 책입니다. 랭보와 관련된 많은 아주 많은 정보들이 있습니다. 랭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랭보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데 아주 많은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시인으로서의 랭보, 걷는 사람으로서의 랭보를 이해하는데 이 책 이상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2권은 다 읽었지만 1권은 절반 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10월이 가기 전에 1권도 마저 읽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의 <랭보읽기>일 뿐입니다. 랭보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고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랭보가 썼던 시와 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랭보의 전체적인 삶에 대해 말씀드리면, 랭보는 1854년 10월 20일에 태어났고, 1891년 11월 10일에 죽었습니다(서른일곱 살). 랭보가 시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열여섯 살 때부터 열아홉 살(1870년 1월-73년 8월)까지 4년이 채 안됩니다. 스물한 살 무렵에 시쓰기를 완전히 그만둡니다. 이후의 삶은 방랑자, 순례자, 고독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 아프리카 탐험가, 상인이었습니다.
랭보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북부이고 샤를빌이라고 하는데, 벨기에와 가까운 곳이라고 합니다. 랭보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습니다. 돌아다닐 수 밖에 없는 직업이죠. 랭보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었기 때문에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결혼했지만, 떨어져 살았습니다. 랭보에게는 형 한 명과 랭보 바로 밑으로 누이동생 세 명이 있었는데, 첫 번째 누이동생은 태어나자마자 죽었습니다. 랭보가 아버지와 함께 산 것은 몇 달 되지 않습니다. 이것마저도 마지막 여동생 이자벨이 태어난 후 한 번도 집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니다. 랭보가 여섯 살 때였습니다(1860).
랭보 가족은 부유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자주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아야 했던 랭보 어머니가 강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활과 교육과 신앙생활 모두가 아주 엄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던가를 짐작하시려면,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아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소화 데레사(1873-1897)의 성녀나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1880-1906)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 당시의 신앙생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70-80세 되신 분으로서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을 한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될 것입니다. 랭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받았을 프랑스의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이 어떠 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버지 없이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랭보는 자신의 처지를 고아들과 빗대어 한 편의 시를 씁니다. <고아들의 새해 선물>인데, 열여섯 살에 <만인을 위한 잡지>라는 곳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랭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랭브’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출판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알려진 랭보의 첫 번째 시입니다. 1870년 1월이었습니다.
<방은 어둠이 그득하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두 아이들의 슬프고 나직한 속삭임. 그들의 이마는 수그러져 있다, 아직도 꿈의 무게네 눌려, 떨리며 걷히는 희고 긴 커튼 자락 아래서. 밖에서는 새들이 추워 서로 몸을 붙이고 있다. 그 날개는 하늘의 잿빛 색조 아래서 마비되어간다. 그리고 새해는, 안개에 싸여, 눈간치 흰 드레스 자락을 이끌며, 눈물과 함께 웃고, 추위에 떨며 노래한다.
가련한 아이들은, 펄렁이는 커튼 아래서, 어두운 밤에 하듯이, 나직이 말한다. 아이들은 생각에 잠겨, 먼 속삭임인 듯 귀 기울이고. 그 둥근 유리 덮개 속에서 금속성 후렴구를 치고 또 치는 자명종의 금빛 맑은 소리에 아이들은 자꾸만 소스라치고, 방은 어름장이고, 방바닥 침대 주위로 상복들이 흩어져 끌려 다닌다.
그대 마음은 벌써 알고 있다. 이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없음을. 이제 집에는 어머니가 없다. 아버지는 아주 멀리 있고. 늙은 하녀가, 그들을 보살펴 주었다. 얼음같은 집에는 어린것들 뿐이다. 네 살배기 고아들, 지금 그들의 마음속에 즐거운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기도하며 한 알씩 세어 내리는 묵주처럼. 아, 정말 멋진 아침이야, 새해 선물 받는 오늘 아침!....>
1870년은 랭보에게 아주 많은 일들이 일어난 해입니다. 1월에 조르주 이장바르라는 선생이 랭보가 다니는 학교에 옵니다. 이장바르는 랭보의 시 세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 젊은 선생(스물한 살)입니다. 랭보는 이장바르 선생님을 통해서 문학과 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즈음 랭보는 당시 방빌이라는 시인을 알게 되었고, 5월에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친애하는 선생님, 사랑의 계절이 되었고, 저는 열일곱 살입니다. 말하자면 희망과 공상이 가득한 나이입니다. 게다가 저는 뮤즈 여신의 손이 닿은 어린이로서, 저의 믿음, 희망, 감각 등 모든 시인의 것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시들 중에 몇 편을 선생님께 보내드립니다... ” 방빌에게 세 편의 시(‘시인의 신조’, ‘나는 믿나이다’, ‘오필리아’)를 보내면서 방빌이 활동하고 있는 잡지에 실어줄 것을 부탁합니다. 물론 방빌은 이 어린이의 시를 실어주지 않죠.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 <햄릿>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햄릿의 연인으로 나옵니다. 햄릿의 아버지는 덴마크 왕이었습니다. 이 왕이 자기 동생에 의해 독살되고, 왕비는 새롭게 왕이 된 자기 시동생과 재혼을 합니다. 햄릿는 자기 삼촌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삼촌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이 여정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아버지 플로니어스 재상을 죽이게 되고 이 충격으로 오필리아가 실성합니다. 실성한 오필리아는 떠돌아 다니다가 연못에 빠져 죽습니다. 햄릿의 어머니가 오필리아의 죽음을 그의 오빠(레어티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거울 같은 물 위에 하얀 잎을 비추며 냇가에 비스듬히 수양버들 자라는데, 그것으로
네 누이가 기막힌 화환을 미나리아재비, 쐐기풀, 들국화, 그리고 입 건 목동들은 더 야하게 부르지만 정숙한 처녀들은 ‘죽은이 손’이라는 야생란과 엮어서 만들었지. 휜 가지에 풀꽃관을 걸려고 올라가다, 한 짓궂은 실가지가 부러져, 풀화환과 네 누이가 울고 있는 개울로 떨어졌어. 입은 옷이 쫙 퍼져 그녀는 인어처럼 잠시 뜬 채, 옛 찬가 몇 구절을 그 동안에 불렀는데, 자신의 위기에는 무감하게 되었거나, 마치 물에서 태어나고 거기에 적응된 생물 같아 보였지. 그러나 멀지 않아 그녀의 의복이 마신 물로 무거워져. 곱게 노래하는 불쌍한 그 애를 진흙 속 죽음으로 끌고 갔어.> (햄릿, 4막 7장)
이 오필리아를 모델로 그린 화가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벤자민 웨스트(1792), 외진 들라크루(1853), 아서 휴(1853), 토마스 프랜시스 딕시(1873), 빅터 뮬러(1869), 쥘 바스티앵 르-파주(1881), 알랙상드르 카바넬(1883),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89. 1894), 쥘 조제프 르페브르(1890), 폴 아베르 스텍(1894), 프랜시스 맥도널드(1898), 프리드리이 헤이저(1921). 가장 유명한 그림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그림일 것입니다. 이 밀레이가 이 그림을 그린 해는 1852년인데, 챨스 디킨슨은 혹평을 했고 반대로 존 러스킨은 극찬을 했습니다. 랭보는 오필리아의 그림에 대한 논쟁적인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고, 오필리아의 복제품 사진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별들이 잠든 고요하고 검은 물결 위로 하얀 오필리아 한 송이 큰 백합처럼 떠내려간다. 아주 천천히 떠내려간다, 긴 베일 두르고 누운 채로. 먼 숲에서는 사냥몰이 뿔피리 들린다./ 슬픈 오필리아, 흰 망령되어, 검고 긴 강울 위로 떠다니는 세월 천 년이 넘었구나. 그 부드러운 광기가 저녁 산들바람에 연가를 속삭이는 세월 천년이 넘었구나. 바람은 그녀의 젖자슴에 입 맞추며 물결 따라 너울대는 그 넓은 베일들을 꽃부리로 펼쳐낸다. 떨리는 버들가지들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울고, 꿈꾸는 그 넓은 이마로 갈대들이 휘늘어진다. 구겨진 수련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한숨짓는데, 잠든 오리나무 속에서, 그녀가 이따금 어느 둥지를 깨우니, 날개 파닥이는 작은 소리 한 번 새어 나오고. 신비로운 오래 하나 금빛 별에서 떨어진다./ ... 그리하여 시인은 말한다. 밤이면 별빛 따라, 너는 네가 꺾어두었던 꽃들을 찾아 나선다고, 물 위에, 긴 베일 두르고 누운 채로, 한 송이 큰 백합처럼, 떠내려가는 하얀 오필리아를 제가 보았노라고.>
1870년 7월 14일에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나폴레온 3세와 비스마르크의 프러시아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참고: 엠스 전보사건). 9월에 스당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하고, 다음 해 1871년 파리도 함락됩니다. 랭보는 자기 조국 프랑스가 프로시아 군대에 짓밟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어 이장바르 선생이 자기 집이 있는 두에로 가면서 랭보에게 자기집 열쇠를 줍니다. 랭보는 그 선생님 집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8월 말에 랭보는 이장바르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8월 25일). “선생님, 샤를빌에 계시지 않아서 행복하시겠군요. 저의 고향은 지방 소도시들 중에서도 특히니 멍청한 곳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곳에 대한 환상같은 것은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낯선 곳에 와 있는 사람처럼 병이 났고, 화가 나 있고,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합니다. 저는 일광욕, 끝없는 산책, 휴식, 모험, 그리고 방랑생활을 소망합니다...”
이런 편지를 보내고 몇 일 뒤 실제로 가출을 합니다. 첫 번째 가출입니다. 당시 시인들의 도시였던 파리로 가려고 했는데, 무임승차가 발각되어 유치장으로 끌려갑니다. 그곳에서 랭보는 이장바르 선생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 “친애하는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하지 말라고 충고하셨던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고향집을 떠나 파리로 온 것입니다. 그 여행의 시작은 8월 29일이었습니다. 저는 운임을 13프랑 지불해야 하는데 돈이 한 푼도 없어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자스 감옥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의지하듯이 선생님을 의지합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언제가 형님 같았습니다. 저를 도와 주시기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만약 수요일에 두에에서 파리행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제게서 새로운 연락이 없으면 그 기차를 타고 이리로 오십시오. 오셔서 문서를 통해서든 검사를 직접 면회해서든 저를 구해주세요. 간청하고 보증하고 저의 체불 운임을 갚아주세요. 선생님께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 주세요. 그리고 이건 명령인데, 이 편지를 받는 즉시 가엾은 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를 위로해주세요. 저는 선생님을 형처럼 좋아하고 있으며, 아버지처럼 사랑하겠습니다. 만약 선생님 덕분에 제가 무사히 석방되면 너를 두에로 데려가 주세요.”
이장바르 선생은 랭보를 위해 체불운임을 지불하고 자기가 있는 두에로 데려옵니다. 이장바르 선생님은 탕자의 귀환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랭보는 이장바르의 집에서 몇 일 머뭅니다. 그곳에는 이장바르가 이모라고 부르는 세 자매가 있었는데, 랭보는 이곳에서 자기 멋대로 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이 두에의 생활이 토대가 되었을 시를 한 편 씁니다. <이 잡는 여인들>입니다. <아이의 이마가 붉은 소란을 그득 담고, 흐릿한 꿈의 흰 무리를 간청할 때, 그의 침대 곁으로 은빛 손톱 가냘픈 손가락의 매력적인 두 누이가 다가온다./ 누이들은 푸른 대기가 꽃 덤불을 감싸는 활짝 열린 십가형 유리창 앞에 아이을 앉히고, 이슬 내리는 그의 짙은 머리카락을 섬세하고, 무섭고도 매혹적인 손가락으로 뒤적인다./ 아이는 누이들의 걱정스러운 숨결의 노랫소리 듣는다. 식물성의 장밋빛 긴 벌꿀 향기 풍기고, 입술에 다시 바르는 침 혹은 입맞춤의 욕망, 휘라팔 한줄기로 간혹 끊어지는 숨결./ 향기로운 침묵 아래, 누이들의 검은 속눈썹 닿는 소리 들리고, 자극적이며 부드러운 그녀들의 손가락은 화사한 손톱 밑에서 작은 이들의 죽음을 아이의 희색 무감각 사이로 타닥타닥 소리 나게 한다./ 이제 아이의 마음속으로 나태의 포도주가 헛소리일지도 모를 하모니카의 탄식으로 올라온다. 아이는 느끼고 있다. 쓰다듬는 손길의 느린 박자에 따라, 울고 싶은 욕구가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스러지는 것을.>
1871년 랭보는 이장바르를 통해 소개받은 시인 폴 드므니에게 편지를 보냅니다(5월 15일). 랭보의 시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견자의 편지/투시자의 편지>로 번역되며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 자신속에 모든 독소를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신앙과 초인적인 모든 그의 힘이 필요한 말할 수 없는 고역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죄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미지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영혼을 단련해서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누구보다도 풍요해진 영혼! 그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미쳐 날뛰며 자기 환각들에 관한 지식을 상실하고 말 때에 그는 만드시 그 환각을 볼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 속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때에는 가공할 만한 다른 작업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쓰러진 바로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좀 어렵게 들리는 말은 이런 뜻일 것입니다. 시인이란 오래된 관습과 전통과 관념과 신념과 개념을 깨부수고, 그 사이로 보여진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시인은 초인적인 노력을 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기 때문에 시인은 누구보다 풍요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랭보는 1871년 9월 그 유명한 폴 베를렌의 초청으로 파리로 갑니다. 이때 랭보가 가지고 산 시는 <취한 배>입니다. “내가 초연한 강을 따라 내려갈 때, 이미 배 끄는 사람들의 인도를 느끼지 못했다. 떠들썩한 붉은 피부들이 울긋불긋한 기둥에 그들을 발가벗겨 못 박아 과녁으로 삼아버렸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내 해상의 깨어남을 축복해 주었다. 희생자들을 영원히 굴리는 자로 불리는 파도 위에서 코르크 마개보다 더 가볍게 나는 춤을 추었다. 열흘 밤을, 항구 등불의 멍청한 눈동자를 아쉬워하지 않으며!... 나는 안다. 번개로 갈라지는 하늘을, 회오리 물기둥과 되밀려오는 파도와 해류를. 나는 보았다. 파도가 그들 빗살창의 떨림을 멀리 굴리고 있는 것을. 나는 꿈꾸었다. 바다의 눈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입맞춤, 눈부시게 내리는 초록의 밤을. 나는 따라갔다. 몇 달 내내, 히스테릭한 암소 떼 같은 암초를 습격하는 거친 물결을...”
이때 베를렌은 결혼한 지 일 년 되었고, 곧 이어 베를렌의 첫째 아들이 태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집니다. 다음 해(1872년 7월)에 이 두 사람은 브뤼셀과 런던을 돌아다니며 사랑을 나누고 시를 씁니다. 이런 관계는 약 2년 정도 지속되다, 1873년 7월에 둘이 크게 다툽니다. 이 싸움 중에 베를렌이 쏜 권총에 랭보는 왼쪽 손목을 다칩니다. 베를렌은 감옥으로 가고,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이 납니다. 집으로 돌아온 랭보는 시를 쓰면서 지냈고, 10월에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는 산문시집을 출판합니다. 말씀드렸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엄청 어려운 시입니다.
이후에 랭보의 시작 활동은 뜸해집니다. 그리고 1875년 2월 하순, 출감한 베를렌에게 <일뤼미나시옹>이라는 시집 원고를 넘겨주고, 절필하게 됩니다.
이후 약 3년은 방랑자, 순례자, 떠도는 사람, 방황하는 사람으로 삽니다. 오스트리아와 빈과 독일 남부, 네델란드 용병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1876년 6월), 탈영하여 스콧틀랜드를 거쳐 고향으로 되돌아옵니다(1876년 4월-12월). 독일과 스워덴 스톡홀름과 마르세유와 로마와 함부르크를 떠돌아다니고, 1878년 알렉산드리아로 가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그리스 키프로스에 가서 생활하다 1879년 6월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1880년 3월 키프로스에 갔다가 이집트로 거쳐 아프리카로 들어가서, 죽기 직전에 자기 고국 프랑스로 되돌아옵니다.
랭보가 살았던 당시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과 러시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뒤이어 미국이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드는데 뛰어듭니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만 하더라도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합니다. 1887년 한불 조약이 체결되어 신앙의 자유가 강화도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합니다. 이런 국제정세가 왜 중요한가하면, 스물네 살 이후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랭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1880년 이후 랭보의 삶은 상인이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 끝 아덴과 홍해 건너편에 있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서 10년을 지냈습니다. 이 동안 글을 썼지만 시와 전혀 관계없는 상업과 관련된 편지들과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랭보와 관련된 몇 가지 일과 편지 몇 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883년 랭보의 애인이었던 베를렌이 랭보를 문단에 소개합니다. 이때부터 랭보가 썼던 시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하지만, 정작 랭보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끔 지리학회에 아프리카 상황에 대해서 지리학회에 보고합니다. 작가의 날카로운 눈으로 수집한 아프리카에 관한 정보가 프랑스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저는 언제나 권태롭게 살고 있습니다. 저만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가족도 없고 지적인 일도 없이 흑인들 틈바구니에서 헤매고 있으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가장 슬픈 것은 지적인 사회에서 동떨어져 있고 고립되어 있어서 제가 점점 바보가 되어가지 않을까 두렵다는 것입니다”(1888년 8월 4일).
1890년 <현대 프랑스>지의 기자가 로랑 드 가보티가 랭보에게 쓴 편지에서 시인으로서의 랭보의 위치가 프랑스에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시인이시여, 나는 당신의 멋진 시들을 읽었고, 데카당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이 학파의 수장인 (당신)께서 내가 편집장으로 있는 <현대 프랑스>지에 기고를 해 주신다면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와 함께 해 주기시기를. 미리 감사하며 경의로 표합니다.”
그렇지만 이 후 랭보의 건강 상태는 빠른 속도로 나빠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걸어다녔던 것과 아프리카의 악조건에서 생활하면서 너무 무리를 했던 것입니다. 무릎과 다리가 부어 움직이지 못하게된 것입니다. 랭보는 들것을 그림으로 그려 제작하게 한 다음, 그것을 타고 1891년 4월 17일, 에디오피아 하라르를 떠나 아덴에 도착합니다. 이어서 5월 7일 아덴을 떠나 고국 마르세유에 30일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가족에게 편지를 씁니다. “저는 고통의 13일을 보내고 어제야 도착했습니다. 제가 너무나 쇠약한데다 추위 때문에 감기에 걸려 콩셉시옹 병원에 입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아프고 지금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거대한 호박처럼 보이는 왼쪽 다리의 병 때문에 저는 해골같은 몰골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은 불투명해졌고 삶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왜 이리 불행한지요. 왜 이리 불행해졌는지요. 결국 우리의 삶은 비참함입니다. 끝없는 비참함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살아야 할까요?”(1891년 5월 21일). 그리고 그 다음 날 다리 절단 수술 결정을 합니다. 랭보는 다음과 같이 전보를 칩니다. “오늘 급행으로 이자벨이나 어머니가 마르세유로 와주세요. 월요일 아침 다리 절단 예정. 사망 위험 있음...”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간다. 내일 저녁 도착 예정. 용기를 내고 참아라.”고 답합니다.
5월 27일 다리 절단 후에도 랭보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비스듬히 못을 박는 것 같았다. 전보다 더 괴로운데도 나는 여전히 걸어다녔고, 특히 말을 타고 내릴 때는 거의 불구자 같았다. 그러고 나면 무릎 위쪽이 부어오르고 슬개골이 불거녀 나오고 오금이 뻣뻣해지고 혈액 순환이 잘 안 되고 통증이 온몸의 신경을 뒤흔들어 복사뼈부터 허리까지 아팠다. 이제 늘 다리를 절었고 몸이 나빠져가기만 한다. 하지만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리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붕대로 감고 마사지를 하고 물에 담그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동생 이자벨에게, 1891년 7월 15일)
랭보의 건강상태는 더욱더 나빠질 뿐이었습니다. 랭보의 요청에 의해 마르세유에서 자기 고향 샤를빌로 왔지만(7월 23일) 다시 마르세유로 콩셉시옹 병원으로 다시 갑니다. 그곳에서 랭보는 해운회사 사장에게 보낼 편지를 이자벨에게 받아 적게 합니다. “소장님, 당신이 내게 계산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지 문의하러 가겠다. 오늘 나는 이 배편으로 변경하고 싶은데, 배 이름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피나르발이면 좋겠다. 그곳에는 이와 같은 배편들이 도처에 있지만 나는 자유롭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 하나도 구할 수 없다... 내 몸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라서 아침 일찍 승선했으면 한다. 몇 시에 내가 배에 승선할 수 있는지 말해 달라... 아르튀르 랭보.”(1891년 11월 9일). 그리고 다음 날(11월 10일) 죽었습니다.
랭보하면 떠올리게 되는 <나의 방랑>이라는 시를 읽어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갔다네, 터진 주머니에 주먹을 쑤셔 넣고서. 내 외투 또한 이상적으로 되었지. 하늘 밑을 걸었고, 뮤즈여. 나는 그대의 충복이었네. 아아, 내 얼마나 찬란한 사랑을 꿈꾸었던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 꿈꾸는 엄지동자. 나는 내 길에서 낟알처럼 시의 운을 땄다네. 내 여인숙은 큰 곰자리. - 내 별들은 하늘에서 부르럽게 살랑대고./ 나는, 길섶에 앉아, 귀 기울였네. 이마에 내리는 이슬방울들이, 힘 돋우는 술처럼 느껴지는, 이 9월의 상큼한 저녁에./ 기이한 그림자들에 둘러싸여 운을 밟으며 칠현금이라도 켜듯, 한 발을 가슴 가까이 들어 올려, 찢어진 신발의 고무줄을 나는 잡아당겼네.>(1870, 9월)
(엄지동자: 샤를 페로의 동화. 가난한 나무꾼 부부의 7형제 중 막내.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아이다. 말을 별로 하지 않은 내성적인 아이지만 가장 똑똑하다. 흉년이 들어 부모가 아이들을 산속에 버려야 했을 때, 엄지동자가 개울에서 주운 돌을 떨어뜨려 놓았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더 깊은 산속에 버렸고, 산속에서 괴물을 만나지만 엄지동자가 괴물을 물리치고 괴물의 재산을 차지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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