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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과 새것 사이에서원고글/영혼의 동반 2010. 8. 12. 20:52
몇 년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집으로>는 일곱 살 먹은 상우가 산골에서 혼자 살고 있는 외할머니 집에 머물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도시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상우와 말도 못하고 글도 모르는 외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함과 오해가 생깁니다. 어느 날 상우는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었습니다. 할머니에게 후라이드 치킨이 무엇인지 손짓발짓으로 설명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머니가 알아차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준비한 것은 백숙이었습니다. 상우는 자기 앞에 놓인 백숙을 보며 ‘왜, 치킨을 물속에 빠뜨렸느냐’고 울고불며 떼를 쓰고, 할머니는 손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미안해 할 뿐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가끔 일어납니다. 전자렌지를 사용하지 않는 어머니께서 제가 살고 있는 수도원에 잠깐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아침식사를 준비해 드리면서 전자렌지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몇 분 안에 음식이 뜨끈뜨끈하게 덥혀지는 전자렌지가 신기하셨던지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습니다. 미지근한 음식을 더 뜨겁게 하기 위해 전자렌지에 넣었고, 시간이 되어 꺼내려는데 어머니께서 그대로 잠깐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생각은 ‘뜸’이 들도록 조금 더 기다렸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렌지로 뜸을 들였다는 말을 들어 제가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대로 꺼냈지만.
우리는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만은 『요셉과 그 형제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깊은 과거의 우물로. 우물은 우물이되 너무 깊어서 바닥을 모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과거를 주절거리고 그런 걸로 골치를 썩는 존재가 인간 외에 어디 있겠나? 그런 생각을 하면, 더더욱 바닥을 모르는 과거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인생살이가 원래 그렇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욕망을 채워가며 즐기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을 초월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고통 받기도 하는 게 인생살이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이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든, 뭘 묻든, 그 시작과 끝에는 인간의 비밀, 신비스러운 인간이라는 존재가 놓여 있다. 말이 급해지고, 속에서 불이 활활 타 오르고, 알고 싶어 안달복달하면서 그저 묻기 바쁜 것도, 인간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토마스 만이 본 인간은 ‘끼여 있는’ 존재입니다. 깊은 우물과 같은 과거와 끝없이 열려있는 미래 사이에 끼여 있고, 우리의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욕망을 대충 채워가며 즐기기를 바라지만 들릴 듯 말 듯 한 영혼의 소리에 응답하고 싶어 하는 마음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익숙한 것과 새롭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한 것 사이에 살고 있으며, 내가 태어난 하나의 어두운 곳과 내가 가야할 다른 어두운 곳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자기 손가락이 문틈에 끼여 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존재이기에 고통과 방황은 필연적이고 자기모순과도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만은 인간을 비참하지만 신비스런 존재라고 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며 이 사람들이 자신의 비참함과 고통을 통해서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 가는 여정과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조금씩 발을 들여 놓는 여정을 쓴 책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것들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이 하느님의 말씀안에서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을 찾으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찾고, 우리의 어둠을 밝혀줄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관장 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침략하여 억압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세관장으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 동족을 수탈하지는 않지만 동족의 돈을 끌어 모아 로마 제국에 바쳐야만 하는 자신의 직업 때문에 괴로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생활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해 혼란스러웠고,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루카 5, 27-32).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로마 7, 15-24). 그 뿐 아니라 자신이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지만 비참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비참한 사람(묵시 3, 17참조)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세관장 레위는 자신을 탐욕과 이기심에로 기울게 하며 어둠과 죽음을 지향하는 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자신의 힘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비참함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기다리고 있었고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레위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셨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그를 초대하시고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이 내적인 가난함과 비참한 상태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 들을 수 있게 했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모습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나서 그는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15-25)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옛것(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새것(미래)을 향해 발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안에 긴장과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결코 참된 새것에 도달 할 수 없으며, 데미안은 이것을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여야만 한다”라고 했고,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 죽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 52)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옛것과 새것, 빛과 어둠, 죽음과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러기에 이것과 저것으로 분열되어 있는 우리,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옛것이 완성되었지만 주님의 나라 또한 옛것의 연장선에서 완성되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옛것’에 대한 적절한 평가 없이 ‘새것’만을 추구해서도 안 되며 정형화되고 고착되어 버린 ‘옛것’만을 고집해서도 안 될 것이다. 더불어 옛것과 새것으로 인한 긴장과 갈등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느긋한 마음과 우리의 삶을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서 보려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상우가 후라이드 치킨 뿐만 아니라 백숙을 알아 가고 어머니가 전자렌지에 익숙해지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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