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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넘어 고독에로원고글/영혼의 동반 2010. 10. 18. 09:03
홀로있음, 인간의 본질
모든 피조물은 ‘혼자’이다: 하늘의 별은 자기만의 길을 혼자서 가고 있다. 동물들은 자기의 몸뚱아리 때문에 혼자일 수 밖에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혼자’라는 것이다. ‘홀로있음’은 모든 피조물에게 해당되지만, 무엇보다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홀로 있는 인간은 자기가 혼자라는 것을 알고, 홀로있음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묻지만, 그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인간은 그가 혼자이기 때문에 인간이다.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 18). 그때부터 사람들은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그들이 서로 “살 중의 살”(창세 2, 23)이라고 인식할지라도 서로에게 낯선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남자에게 여자를 데려다 주셨다고 하더라도 혼자인 또 다른 인간을 데려다 준 것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나온 인간들 모두가 각각 홀로 서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말로 인간은 홀로이며 외로운 존재인가?”라고 묻는다. 사랑과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만나는 관계를 통해서 외로움이 극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순간이 지나면 더욱 더 큰 외로움에 빠져 사람들은 또 다른 기회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홀로있음을 두려워하면서도 홀로있음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 자기보호본능이 사람들을 더욱 더 외롭게 한다.
외로움, 홀로있음의 고통
홀로있음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외로움loneliness이라는 단어가 있다. 홀로있음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고독solitude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두 단어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별하여 사용할 필요는 있다.
“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입니다. 제 마음의 곤경을 풀어주시고 저를 고난에서 빼내주소서”(시 25, 16-17). 외로움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은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잊게 해 주었던 누군가와의 이별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이런 외로움이 지속될 때 심각한 우울을 가져온다. 외적인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진 사람들은 외롭지 않을까? 그들 또한 ‘외로워한다’는 증후를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숨기거나 회피할 수 없는 외로움이 있다. 죄를 지었을 때의 외로움이다. 그때 그사람은 오로지 홀로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외로움이 그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고독, 홀로있음의 영광
홀로있음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을 때, 삶의 궁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홀로있음의 영광(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만이 이것을 해 낼 수 있다. 자연의 침묵을 향한 갈망이 있다. 구름과 새, 나뭇잎, 흐르는 강물.. 이들의 침묵을 통해서 홀로있음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이고, 그로부터 다시 삶으로 되돌아 간다.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산책을 하고... 혼자이지만 복된 홀로있음이다.
외로움이란 자기가 기대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의 빈 자리이다. 현대인들이 외로움에 더 취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인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 그래서 더 많이 기대하고 요구하지만 이것이 모두 채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의 풍요루운 삶이 현대인들을 더 외롭게 한다. 숨을 곳이 없는 현대인들의 삶이 외롭게 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면서 인간의 사생활이 보장되어있지 않다. 옛날 시골의 주거 환경과 현대의 아파트 생활과 비교해보라. 아파트에 편리함은 있지만 골방이나 다락방처럼 숨을 곳(쉴 곳)이 있던가?
고독, 주님의 손에 붙들림
하느님은 우리가 홀로있지 않으면 안되는 곳으로 부르신다. “저는 웃고 떠드는 자들과 자리를 같이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예레 15, 17).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마태 4, 1),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 12),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루카 4, 1).
외로움과 고독한 시간없이 사람은 창조적으로 될 수 없다. 광야의 고독한 시간을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던 예수님께 무엇이 일어났던가?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 13). 땅과 하늘 자신 주변과 내부에 있는 들짐승과 마주하면서 스스로 거룩한 힘과 악마적인 힘 사이의 싸움터가 되셨다. 고독을 통해서 우리자신을 창조와 파괴, 생명과 죽음, 하느님과 악의 세력 사이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외로움과 고독 모두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그렇지만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존재의 중심, 우리 홀로 있음의 근거인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가 하느님의 중심까지 내려가(고양되어) 그 속으로 흡수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 버리지 않은 채 그곳에서 쉴 수 있다. 하느님과 함께 했던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소통을 하게 되며, 참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사랑도 고독으로부터 솟아난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고독은 홀로 있을 지라도 외롭지 않은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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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금기 언어'처럼 생각하고 있는 말은 무엇인가?
* 내 삶에서 외로웠던 때는?
* 외로움을 느끼는 주된 요인은 무엇인가?
* 외로움이 우리 삶에 주는 영향은?
* 외로움과 관계되는 성경의 인물, 성경 구절은?
* 외로움과 고독, 어떤 차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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