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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게 해 주십시오원고글/영혼의 동반 2009. 12. 9. 23:16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십시오
2009년 12월
지리산 기슭, 섬진강을 끼고 있는 산골에서 태어난 저는 어릴 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대단한 이야기도 아닌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는 이야기꾼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은 꼬마들이 이야기 해달라고 조를 때 거절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 중에 제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산마루에 선 노루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꾼의 말에 의하면 노루는 비록 그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쫓기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어느 산마루에 서면 일단 멈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 많은 꼬마들이 “왜 도망가지 않고 서느냐?”라고 묻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그 노루는 산마루에 서서 사냥꾼과 사냥개가 아직도 자신을 쫒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지금 자기가 어디에 서있는지 주변을 살핀 뒤에, 자신이 어디를 향해 도망가야 살 수 있는지를 살펴본 다음 그곳을 향해 다시 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꼬마들은 피를 흘리면서도 잠시 멈추어 선 노루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듯합니다. 저는 총에 맞은 노루가 산마루에 서면 멈추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도 못하고 그 마을을 떠났고, 그 후로도 그런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산마루에 서 있는 그 노루가 저 자신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이나, 가정 파탄, 나이에서 오는 신체적인 변화 등으로 지극히 당연했던 일상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살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하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당혹스럽고 절망적인 상태로부터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테도 겪었던 듯합니다. 단테는 마흔 두 살 때 『신곡』을 쓰기 시작하여 13년 뒤에 완성했는데, 이 서사시의 맨 처음을 “인생의 중반기에서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캄캄한 숲 속에 있었다. 그 가열(苛烈)하고도 황량한, 준엄한 숲이 어떤 것이었는지 입에 담기조차 괴롭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진다. 어떻게 하여 그 숲 속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쉽게 말 할 수 없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어떤 형태의 어려움이던 우리가 겪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움과 부딪쳤을 때, 우리는 아주 쉽게 그리고 자주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어 버렸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적당히 욕심을 부리고 적당히 교만하게 살았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더 많이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했던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얼마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지만 그것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나누며 살았던 내가 아니었던가?’라고 답을 찾기 어려운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저의 부족함과 경솔함에 비해 지금 저의 고통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대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고통과 어둠의 시간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전환점이고 출발점이 됩니다. 시인 서정주는 한 송이의 국화를 피우게 하기 위해 소쩍새가 울었고, 천둥과 먹구름, 무서리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진통 끝에 우리가 보게 될 꽃을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표현합니다. 시인과 비슷하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 삶의 혼란과 방황을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정화의 과정인 ‘어둔 밤’이라 하면서, 이 밤을 “한낮 빛보다 더 탄탄히”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노래합니다.
마르코 복음에는 바르티메오라는 눈 먼 사람이 어떻게 ‘다시’ 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바르티메오를 잘 볼 수 있었던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 바르티메오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길거리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어느 날 자신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자리잡고 있었던 바르티메오는 그분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자신의 외침을 저지하려는 사람들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지 않았습니다. 절박했겠지요. 이런 외침을 듣고 저만치 가던 그분이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분의 음성이 들렸고, 그분께 가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음도 알았습니다. 바르티메오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어렵사리 그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르티메오에 관한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새로운 눈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바르티메오처럼 우리도 잘 볼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잘 보였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잘 보였습니다. 너의 아름다운 모습이 잘 보였고, 너의 부족함마저도 예쁜 모습으로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르티메오가 하나, 둘 껴입지 않으면 안되었던 옷들이 갑옷처럼 두껍게 되어 그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고, 볼 수 도 없게 만들어 버렸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의 원의와 관계없이 멈출 수 밖에 없는 이 곤혹스러운 상태에서 바르티메오는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 보았을 것입니다. 더 큰 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작지만 소중한 것을 소홀히 했던 생활,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함부로 대했던 삶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 당장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 때문에 지금까지 들을 수 없었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암에 걸린 것을 몰랐을 때에도 나는 내 안에 들어 있는 병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늘 ‘눈물을 삼켜 온’ 결과로 내 안에 무엇이 생기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평생 흘리지 않았고 또 흘리기를 원치 않았던 모든 눈물이 목에 고여 종양으로 변한 것이 분명하다. 흘러내려 씻겨져야 할 것이 씻겨지지 못한 때문에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고통이 이제는 그 한계를 넘어 폭발하여 나를 갈갈이 찢어버린 것이다.”
바르티메오와 우리들의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주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 주님을 향해 가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시편에서는 이것을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을 찾아 힘을 얻어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 105, 3-4)고 노래합니다. 바르티메오가 길가에 앉아 들었던 소리는 바로 이 말씀이었을 것이고, 그때서야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분을 향해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라는 시인은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멈추어 섬’을 통해서 다람쥐가 도토리를 감추는 것을 보게 되고, 한낮에도 별이 반짝이듯이 반짝이는 강물을 보게 되고, 눈가에서 시작된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가 입가로 번져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던 산마루에 선 노루처럼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 46, 11)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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