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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쓰는가기도.영성/다네이 글방 2013. 5. 23. 21:25
5월 23일, 목요일
(* 기자 안수찬의 글쓰기)
글은 자아의 노출이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 앞에 발가 벗겨지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기가 두렵다.
글에 담긴 자신을 누군가 폄훼할까 두렵다.
어떤 글도 독자를 한정하거나 특정할 수가 없다.
누가 읽을지 알 수 없고 의도할 수 없으므로 글쓰기는 때로 위험천만한 모험이 된다.
불특정 독자가 나(의 글)를 간단히 오해할 것이다.
두려운 나머지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일기를 쓸 때조차 미래의 독자를 의식한다.
글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이지 않다.
동시에 사람들은 글쓰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불멸에 대한 동경이다.
삶은 찰나의 시공간에 붙잡혀 있지만 글은 그 올가미를 벗어버릴 수 있다.
글은 소통의 경계를 붕괴시킨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죽고 난 다음까지 나를 알릴 것이다.
글은 기본적으로 내가 주도하는 미디어다.
글 쓰는 이가 글 읽는 이를 지배한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아를 거리낌 없이 펼쳐 보일 광대한 영지를 갖는 것이다.
이 영토 안에서 나는 자유롭고, 그 땅에서 나는 세계의 주인이다.
글에 비하자면 말은 덧없다.
기껏해야 가족, 연인, 동료에게 나를 표현할 뿐이다.
매스미디어를 장악한 웅변가가 아니라면,
뭇 사람의 말은 공중에 흩어져 자취조자 남지 않는다.
글은 불멸의 미디어이므로, 사람들은 찰나의 삶을 글에 담으려 안달한다.
<끊어 치면서 리듬을 탄다>
끊어 치기는 글쓰기의 배터리다.
끊어 쳐야 글의 시동이 걸린다.
문장을 끊어 치는 것은 글쓰기의 출발이다.
'주어-목적어-서술어'의 기본 단위로 문장을 끝내야 한다.
수학의 '소인수 분해'처럼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때까지
모든 문장을 단문으로 줄이는 것이다...
끊어 치기는 만병통치약이다.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쓰고 싶은가. 끊어 쳐라.
괜찮은 소설을 쓰고 싶은가. 끊어 쳐라.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기사를 쓰고 싶은가. 당연히 끊어 쳐라.
처음부터 제가 쓴 글을 끊어 치는 건 쉽지 않다.
제 글을 끊어 치면, 오장육부를 잘라내는 듯 고통스럽다.
이럴 때 남이 쓴 글을 끊어 치면 도움이 된다.
싹둑싹둑 썰고 끊고 후려칠 수 있다.
문맥에 신경 쓰지 말고 기계적으로 끊어 쳐도 된다.
단 한 번이라도 끊어 치고 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글이 그럴듯해 보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일단 길어진 문장은 제 관성으로 더 장황한 글을 만든다.
장황한 글에서 생각과 느낌은 흩어지고 희미해진다...
긴 문장은 독자의 시선과 호흡을 방해한다.
긴 문장을 따라가다가 도중에 읽기를 포기한다.
유장하지만 읽히지 않는 글과 담백하여 잘 읽히는 글 가운데
어느 것이 훌륭한 글이겠는가...
문장을 끊어 치면, 리듬을 발견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고유의 리듬을 갖고 있다.
글만 읽어봐도 필자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일이 그래서 가능하다.
세상 모든 이에겐 문장의 리듬이 내장되어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그런 리듬을 자유자재로 끄집어낸다.
끊어 치기는 내장된 리듬을 발견하여 끄집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글의 리듬에 있어 정해진 악보는 없다.
오직 각자의 리듬만 있다.
내가 즐기는 리듬은 '짧게-짧게- 조금 길게- 아주 길게-다시 짧게'의 방식이다.
끊어 치지 않으면 리듬을 담을 수가 없다.
리듬을 욕심내기 전에 끊어 치기부터 해야 한다.
☞ 초보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초보자들은 자기 생각을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
애기들이 마루에 온갖 장남감을 일렬로 늘어 놓듯이.
문장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글을 숨을 헐떡거려가며 글을 읽어 줄 정도로 독자들은 너그럽지 않다.
최소한 쉼표라도 찍어 주는, 서비스 정신.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세상 모든 필자는 제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히길 원한다.
세상 모든 독자는 모든 글을 함부로 성의 없이 읽는다.
독자가 글에 완전히 몰입하길 원하는 필자의 기대는 대부분 배신당한다.
독자는 글을 대충 읽으려 한다.
이 비극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면 된다...
심지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독자를 글에 푹 빠드려야 한다.
독자를 글 속에 파묻히게 하려면 시공간과 인격의 디테일을 보여줘야 한다.
"그는 슬펐다."라고 설명하지 말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라고 보여주는 것이다.
☞ 강론 방법론 중에 하나로 설명하지 말고 강론을 보여주라는 말이 있다.
멋진 산과 바다 풍경을 보는 듯이,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시각적으로 글을 쓰라는 말이다.
<디테일을 전략적으로 배치한다>
그러나 어떤 디테일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세계는 무한한 사실의 연쇄 고리다.
작은 사실들이 끊도 없이 얽히고 설켜 세계를 구성한다.
그 디테일의 전부를 기사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디테일 가운데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고민에 휩싸일 때마다 나는 간단한 방법을 택한다.
취재 과정에서 내가 실제로 몰입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공연히 거창한 순간을 고르려 하지 말고,
실제로 기자가 몰입했던 순간을 돌아보면 거기 전략적 디테일의 대상이 있다.
☞ 길이에 관계없이 글은 얼개가 있어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촛점을 맞추는 의도적인 배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잡담에 불과하다.
<정보가 아니라 성격을 전달한다>
건조한 단신 기사조차 사건, 사고에 얽힌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독자가 기사를 읽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면
읽기 힘든 기사, 지루한 기사,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기사가 된다...
어떤 면에서 기사는 사람person이 아니라 인물character을 드러내는 글이다.
인물에겐 반드시 성격과 태도가 있다.
사람의 정보가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 중요하다.
☞ 사람과 사물에 대한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나름으로 재해석해야 특색있는 글이 된다.
초심자들에게는 어렵지만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펑범한 말에서 탁월한 문장을 찾는다>
좋은 문장은 책 속에 있지 않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말 속에 참으로 훌륭한 문장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좋은 책을 읽어 좋은 문장을 배우게 되는 이유가 있다.
말은 공중으로 흩어져 자취조차 남기지 않는다.
오직 글만 사람에게 각인된다.
좋은 말은 사라지고 좋은 말만 기억된다....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절절한 이야기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문장을 잡아채서 쓰면,
독자들은 그 사람의 마음과 쉽게 같아진다.
☞ 항상 깨어있지 않고 메모하지 하지 않으면 좋은 말을 낚아 챌 수 없다.
말과 생각의 낚싯꾼이 되어야 하고 이것을 글로 표현하려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쓴다>
글 가운데 가장 높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다.
즐겁고 기쁘게, 슬프고 애달프게 만드는 글이 위대한 글이다.
글 쓰는 모든이가 그런 글을 쓰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
기사에서 그런 성취를 이뤄내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부터 문장까지, 철처히 담담하게 써야한다.
울리고 싶은가. 울지 마라. 웃기고 싶은가. 웃지 마라.
필자가 먼저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정이입을 부추기는 문장을 쓰면,
독자는 울고 싶다가고 눈물을 거두고, 웃고 싶다가도 미소를 지운다...
인상적 도입과 그럴듯한 마무리를 결정짓는 것은
수려한 문장이 아니라 '결정적 장면'이다.
검박한 도입과 마무리가 좋다.
더 검박할수록 더 감동적이다.
☞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
자기 감정의 유치한 표현에 대해 끝까지 읽어 줄 독자는 많지 않다.
<옹기 빚는 장인의 마음으로>
독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입하여 공감할 수 있는 어떤 타자다.
그 공감은 때로 분노, 때로 웃음, 때로 울음이다.
공감은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있다.
독자는 기자에게 "타자, 이웃, 세계와 공감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정돈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기자들은 지금까지 '정보'에 방점을 뒀다.
앞으로는 '공감'에 주목해야 한다...
기사는 장인의 옹기와 비슷하다.
너무 흔하여 사람들의 발길에 차일 정도다.
그래도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적 필요에 반드시 부응한다.
항상 희로애락을 받아 담는다.
그런 옹기를 만들기 위해 장인은 수십 년을 거듭하여 빚고 굽고 깨고 다시 빚는다.
사람들은 옹기 귀한 줄 좀체 모르지만,
장인은 오롯한 자부심으로 평생을 버틴다.
기사 쓰기의 이치가 이와 같다.
☞ 기교를 부리고 미사려구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흉내낸다고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수양과 함께 가야 한다.
(『나는 어떻게 쓰는가』, "나는 기사를 어떻게 쓰는가", 안수찬, 씨네 21북스, 2013, 3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