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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복복서가, 2025
* 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아이와 로봇”, 31)
+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왜 그곳에 있는지 이유도 모른 채 들어간 낯선 도시.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진심으로 자기를 환영할 때, 이방인의 두려움이 누그러진다.
* (문학의 언어는) 모호하다. 이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한다. 때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이며,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 (“우물 정자 천 개” 48)
*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와실망의 왈츠” 61)
* 인간은 모두 변한다. 단 설득력 있는 ‘도발적 사건’을 통해서. 그런데 인물의 변화를 주로 이야기를 통해 접하다보니 어느새 많은 이들이 인간의 의미있는 변화는 오직 큰 사건만을 통해서만 일어난다고 믿게 된 것 같다. 그럴듯한 이유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변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테세우스의 배” 79)
* 작가의 일은 캐릭터를 만들어 대사와 행동을 부여한 뒤 출판을 통해 세상에 내보내면 끝이 난다. 그때부터는 독자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창작이 시작된다. 독자는 그렇게 주어진 인물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내면화한다. 그 과정이 계속 이어지면 어떤 순간 독자는 개개의 인물에 대해 그 누구의 해석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판단을 갖게 될 것이고, 때로는 창조자인 작가에게도 맞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물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독자의 것이 되어 있을 테니까.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자자와 관계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무한히 재생산/재창조될 대상이며, 텍스트에서 저자는 명목상의 저자일 뿐이다. 더 나아가 그는 독자를 텍스트로 유희하며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하는 다시 말해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모른다” 94)
* (나의) 엄마는 (자식인) 나를 정말로 잘 알았던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 즉 다른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모른다” 95)
*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의 인사는 "I see you.", "나는 당신을 봅니다”이다.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걔 얼굴을 보겠냐?‘라는 말은 ’이제 걔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보는 것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널 당장 보고 싶어“라는 말은 사진을 보내달라는 뜻이 아니다. 보는 것은 같은 시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다. 만나서 의미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모른다“ 98-99)
* (나는)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하다. (”모른다“ 102)
* 격렬한 고통 뒤에 찾아오는 몇 분간이 짧은 죽음 체험. (요가 수련 후의 휴식) (“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 103 )
*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은 성장과 변화의 동력이 된다. (“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 107)
* (<욥기> 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찾는 일의 무의미함을 발견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 111)
* 언젠가 ‘잘 통제된 고통’이 아닌 그야말로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끝 모를 고통에 직면할 때, 나는 무엇으로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고통이 닥치지도 않았는데 앞질러 두려워하는, 아니 혐오하는 이런 증상은 전 세계적 현상이 되어 있다. (“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 113)
*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아마도 고통 없는 삶을 일종의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처럼 생각하는 지구상 첫 번째 세대에 속할 것이다. 고통은 스캔들이다.”(데이비드 B. 모리스)
* “만성적 고통이 견딜 수 없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사회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성적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 우리 사회를, 우리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를 반영한다.”(한병철)
* 이것이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이고, 만일 이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속절없이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고통의 의미를 찾아 견디기보다 몸 가볍게 달아나며 마법 구두를 신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 살았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기꺼이 견디고자 할 의미있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 (“스캔들이 된 고통” 116)
*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는 영사실에서 일하는 알프레도 할아버지와 친하다.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영화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토토가 영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토토가 기차를 타고 로마로 떠날 때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말한다. ‘돌아오지 마라. 절대 그리워하지도 마라. 편지를 쓰지도 마.’ (“이탈” 121)
*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몰랐고 알아도 줄 수 없었다.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141)
* 그들은 묻지 않고 그냥 썼다. 그들은 자기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쓰는 게 좋고 작가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계속 썼을 테고, 쓰다보니 작가도 되었을 것이다. (”사공이 없는...“ 143)
*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크고 우람한 나무처럼 도드라지는 이가 있다. 그런 사람은 그늘도 크다. 그 그늘 속에 존재감없이 묵묵히 앉아 있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용의 용“ 151)
* 십대와 이십대에는 몸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날마다 술을 퍼마셔도, 매일같이 나쁜 음식을 먹어도, 운동을 전혀 안 해도 몸은 멀쩡했다. 몸은 충동적인 내 정신의 순종적인 노예로서 모든 부당한 처사를 묵묵히 감당했다. 함부로 방치되고 혹사되었다. 지금은 돈과 시간, 노력을 많이 투입해야만 몸을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다. 마음도 돌보지 않았다. 되는 대로 아무 생각이나 받아들였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대충 살아도 온 우주가 너그럽게 보아주던 시간이었다. (”인생의 그래프“ 157)
*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이렇게 설명한다. 행복은 완전한 삶을 통해 덕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인데, 덕을 갖춘 사람이 되려면 올바른 양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행위자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니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은 운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도덕적 운“ 170)
* 사람의 참된 모습을 보려면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첫인상은 전부가 아니며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최선과 최악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도덕적 운“ 172)
*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이는 대낮의 멀쩡한 정신이 아닌 어둡고 불가해한 세계가 자기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적 운“ 178)
* 인간만이 꿈이라는 이상한 세계, 잠에서 깨어나는 즉시 휘발되기 시작하는 이 아까운 환상적 질료를 언어로 고정시키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것이 이야기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말로 만들어 전파했지만 곧 글로도 적기 시작했을 것이다. (”도적적 운“ 179)
* 나는 가끔 ‘어쩌면 나에게 가능했을지도 모를 어떤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본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 다시 말해 내가 살아갈 수도 있었을 삶이란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상과 비슷하다. 나는 거기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어떤 위안“ 185)
* 그 모든 상상 끝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럴 때, 내 눈앞의 세계는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내가 하마터면 살 수 있었을 n개의 인생 중 하나로 보인다. 지금 이 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과 스스로 결정한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칵테일이며 내가 바로 이 인생 칵테일의 제조자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삶을 잘 완성할 책임이 있다. (”어떤 위안“ 187)
* 누구나 수천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그 중 한 개의 삶만 살게 된다. (클리퍼드 기어츠)
* 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에 나쁜 결과와 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은 그 어떤 전략적 고려보다 우선하고, 살지 않은 삶에 대한 고찰은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찾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앤드루 H. 밀러, <우연한 생>에서)
* 삶을 사유하다보면 문득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토록 소중한 것의 시작 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작은 모르는데 어느새 내가 거기 들어가 있고, 어느새 살아가고 있고, 어느새 끝을 향해 하고 있다. 내 삶의 서두는 기억이 나지 않는 반면, 나와 무관한 다른 삶들은 또렷하고 그것들은 대부분 소설이나 영화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어떤 위안“ 190)
* 내 삶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이며(1/무한=0)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위안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