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하느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관하여 아버지가 감정에 북받쳐 설교하면서 찬양하고 권유할 때 나의 회의와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다. 다음과 같은 의심이 마음속에 일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인 나를 이사악처럼 인간제물로 삼아 칼로 찌를 수 있을까? 아니면 불공정한 법정에 내맡겨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할 수 있을까? 아니, 아버지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성서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정말 무시무시할 수도 있는 하느님의 의지를 경우에 따라서는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인간보다는 하느님에게 더 순종하라고 재촉하는 말을 들을 때, 그런 말은 그저 강단 위에서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라는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의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느님의 의지는 깜짝 놀랄 만하며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93)
***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쳤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느님께 대한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아무리해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다만 그것(하느님의 뜻)을 수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결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뜻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를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 놀랍지 않는가. 그 자유의지로 사람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던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수없이 많은 교회안의 순교자들. 그분들은 아브라함이 했던 그 일을 했던 분들이시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그분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분들이다. 순교자들 중에 첫 자리에 마리아를 두는 것도 처녀로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 수많은 순교자들의 원형이시면서, 첫번째 순교자인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