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아는 아버지(목사)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깊은 의심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전혀 믿지 못하거나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진부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 그후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와 수많은 토론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토론은 늘 만족스럽지 못하게 끝나버렸다. 그 토론들은 아버지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 되고 믿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는 체념한 듯 몸을 돌렸다. (<카를 유: 기억 꿈 사상>, 카를 융/조성기 역, 김영사, 2024, 86-87)
***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믿음을 위해 알아야 한다‘. 믿음과 이해의 상호관련성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으며, 중세 교회 때는 이 두 영역의 역동성에 대한 논쟁과 토론이 꽃을 피웠다. 지금도 앎 이전에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앎과 함께 하지 않는 믿음의 허상과 위험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개인의 체험을 통해 믿음으로 도약하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속에 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알게 된 여인이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초대하여 그분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이런 시간을 가진 다음,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인에게 말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요한 4,42)
믿음은 전달된다. 우리가 받은 값진 유산이다. 그렇지만 항상 주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과 체험이 없는 믿음은 카를 융의 아버지처럼 진부하고 공허한 것으로 될 뿐이다. 기도하면서 ’주님 당신을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 당신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당신을 믿게해 주십시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