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 37)
우리들은 기다림이 얼마나 힘들고 지루한지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한 밤중에 언제 올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일 것입니다. 요새처럼 휴대폰으로 몇 분 간격으로 어디 오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어 마냥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것도 꾸벅꾸벅 졸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다린다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런 밤을 새워 기다리는 사람을 보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조금 이상합니다. 혼인잔치에 갔다 돌아온 주인이 자기 종들이 깨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종들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무슨 이유로 깨어있는 종들이 행복하다고 말했을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행복에 대해 한 말을 통해 조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인간이란 본성적으로 무엇인가 갈망하는 존재이다. 좋은 것을 갈망하며, 좋은 것이기에 선하고, 선한 것이기에 행복을 가져다 준다.”
성인의 말에 따라 성경의 말씀을 풀이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혼인잔치에 간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 갈망 때문에 종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 갈망 때문에 종에게는 밤의 기다림이 지루하거나 짜증나는 시간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 토마스의 말에 따라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갈망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긴 하지만, 완전한 행복은 아닙니다. 자기가 갈망하는 것이 충족되어야만 온전히 행복한 것으로 됩니다.
다시 말해 종이 정말로 행복하게 되는 것은 주인이 자기에게 돌아오고, 자기가 주인을 만났을 때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만 종의 기쁨이 온전한 행복으로 되는 것으로 됩니다.
종이 주인으로 가득 차게 되는 ‘존재의 충만함’(실존주의자 가브리엘 마르셀)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종이 온전히 주인으로 채워지고, 주인 또한 온전히 종으로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면서 한 사람으로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주인이면서 종이되는 거고, 종이면서 주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이런 상태를 주인이 자기를 기다렸던 종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 종에게 시중드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에페소서에서는 ‘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으로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런 갈망과 주님께서 이런 우리에게 오시리라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지금부터 벌서 주님과 함께 복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계셔 복된 사람인가? 우리 행복의 원천인 주님을 기다리고 찾고 있는 사람인가? 가끔 이런 질문을 하고 성찰하면 지내길 빕니다. 그리고 오소서 주 예수님이라고 기도하며 지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