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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말씀 맛 들이기, 빛줄기원고글/빠씨오 2009. 10. 15. 22:25
염주동 성당 <빛줄기>
주님 말씀 맛 들이기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초등학교 2 학년 말부터 한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선생님의 개인지도를 받고 나서요.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교실에 혼자 남아 공부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고, 들이나 산을 뛰어 다니며 놀고 싶은 나를 붙잡아 놓은 선생님을 미워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지도를 받을 때마다 교실 밖에서 저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셋째 누나에게 미안한 마음도 조금 있었던 것 같고요.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 글자로 된 것은 아무 것이나 읽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읽을 수 있는 책을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만, 읽고 싶다는 욕구만은 아주 컸습니다. 이런 저의 욕구는 벽지로 사용되고 있었던 헌책이나 신문지등을 읽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벽지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그 때에는 헌책이나 신문지등으로 벽을 바르거나 ‘땜빵’을 했던 것 같은데 이것들도 저에게는 아주 좋은 읽을꺼리였습니다. 벽 앞에 앉거나 어떤 경우에는 누워서 그것들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벽지를 자주 바꾸지 않아 같은 내용이었겠지만 아무리 읽어도 재미있었습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리고 조각난 글들이어서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은 저의 상상력으로 메우면서 읽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은 제가 읽을 수 있고 읽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 개의 일간지, 두 세 개의 주간지, 서 너 개의 월간지, 여러 가지 공문, 인터넷 뉴스, 신문과 함께 오는 광고용 전단지, 하느님의 말씀 등. 읽을 것이 부족했던 어린시절과 비교해 보면 복이 터졌지요.
읽을 수 있는 것이 많아졌고 많이 읽었다면 그만큼 더 기쁘고 행복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읽는것을 짐스럽게 생각하거나 짜증을 내고 있는 저를 보게 되거든요.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많은 읽을꺼리들 밑에 제가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깔려버렸고 읽는다 해도 건성으로 읽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 “뼈 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 하겠습니다”(예레 20, 9)라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호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영원하시며 어느 곳에도 메이지 않으시고 어떤 그릇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 되신 이 말씀이 이제 우리의 몸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뼈 속에 감추어진’ 주님의 말씀이 저를 뚫고 나와 자유롭게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 읽었는지 잘 기억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커다란 대리석을 가지고 코끼리를 조각하고 있는 조각가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하여 이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코끼리 상을 만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조각가는 “저는 망치와 정을 사용해 이 대리석 안에 있는 코끼리를 끄집어내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수없이 많은 망치질과 날카로운 정이 파고드는 괴로움의 시간이 지나면서 제 뼈 속에 있었던 주님의 말씀이 밖으로 나오게 되고 제 안에 숨어있었던 하느님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말이겠지요.
요새 사람들은 무겁고 진지한 것을 싫어하며 빠르고 밝고 가벼우며 산뜻한 것을 제일로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이런 ‘쿨한’ 방법만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느리고 답답하더라도 읽고 읽으면서, 마음에 새기고 새나가는 방법을 통해 조금씩 하느님 말씀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요새 그 어떤 읽을꺼리 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더 자주 읽고 쓰고 외우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묵시록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10, 9). 저는 염주동 본당의 많은 교우들이 꿀보다 더 단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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