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오후》, 토마시 할리크/차윤석, 분도출판사, 2023
* 우리 인생사와 우리 역사의 사건들이 전개되는 시간은 일방통행이 아니면 우리 삶의 공간은 다차원적이다. 전 세계적으로 연결된 우리 사회에서는 전근대적.근대적.초근대적.탈근대적 생활방식이 공존하며 이따금 놀라운 방식으로 서로 만난다. (64)
* 복음이 지닌 급진성에 등을 돌리고 기득권에 순응해 온 속물근성의 종교에 대한 본회퍼의 비판은 키르케고를 연상시킨다. 그는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자기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자기 신앙의 이해를 확증했다. 본회퍼의 그리스도교에 관한 견해의 정치적 측면을 계승한 이들이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91)
* 나는 미래의 그리스도교가 무엇보다도 새로운 해석 공동체가 되리라 생각한다. 새로운 독해 공동체, 하느님 계시의 원천이 성서와 전통, 특히 시대의 표징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새롭고 심층적으로 해석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93)
* 교회가 타성에 젖어 전통에 의존하고 신앙인의 교육과 굳건한 영성 형성을 소홀히 한 결과 가톨릭 신자들이 대거 이탈해 오순절 종파의 근본주의 신학과 종종 피상적인 감성적 신앙심으로 갈아타게 되었다는 의견이다. (98)
* 신앙인의 삶을 통제하고 규율하믄 교회의 힘은 약해지고 있으며, 신앙을 표현하는 언어와 신앙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 사이의 결속도 약해지고 있다. 현재 교회 형태가 맞이한 위기는 단지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교회가 선포하는 내용 및 형식과 신자들의 생각과 견해 사이의 괴리가 갈수록 커지는 것이다. (107)
* 나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복음의 역사인 동시에 신앙인의 영적 여정의 일부인 이런 정오에 짙게 덮인 암흑의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포용하고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14)
* 정오의 어둠에서 유일한 빛은 갈망 그 자체이다. 하느님은 영혼을 관상적 메마름 상태로 두실 때가 있다. 그 영혼은 어둠에 빠져서 메마름을 체험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곁에서 고독과 침묵속에 머물고 싶은 갈망을 계속 갖게 된다. 영적 여정의 이 단계에서 신앙은 외부 버팀목을 찾지 못하며, 인간 내면에서는 기도 중에 위로의 강줄기가 흘러오는 대신 광야의 건조함과 고독만이 팽배하다. 십자가의 요한에게 이 여정의 구간은 바로 영적 삶에서 벌거벗고 진정한 핵심을 드러내는 '벌거벗은 신앙'으로 탈바꿈하는 단계이다. (117)
* 무신론 체제 아래서 가혹한 세속화 시기를 이겨 낸 교회일수록 다시 민주주의가 세워진 뒤 이어지는 부드러운 세속화에 더 놀라는 것처럼 보인다. 탈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세속주의 자유주의 소비주의의 쓰나미를 개탄하는 강론이 점점 더 늘어났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반서방적 수사학을 그대로 복사해 쓰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136)
*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경쟁자는 세속적 인본주의와 무신론이 아니라 교회에서 벗어난 종교심이다. (139)
* 길로서의 신앙과 확실함으로서의 신앙 사이, 순례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터전으로서의 교회 사이, 기억과 서술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다. (147)
* 공산주의가 별 저항 없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붕괴한 것은 주변의 많은 상황이 맞물려 생긴 결과였지만, 무엇보다도 실제로 존재하던 사회주의 체제가 글로벌 자유시장에서 상품 및 이념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긴 필연적인 결과이다. (157)
* 루마니나와 옛 유고슬라비아 국가와 달리 중부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폭력없이 혁명이 일어난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경찰국가 체제에서 자유 사회로 터무니없이 순쉽게 이행하는 대가로 과거를 정리할 중요한 정치적.심리적.도덕적 과제를 포기했다. 새로운 시대의 문턱이 폭력과 복수심으로 얼룩지지 않았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거를 정리할 준비 부족은 자비와 용서의 미덕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부작위의 죄, 진리와 정의에 반하는 죄를 지은 것이다. 사회가 악에 노출되었고 도덕적으로 붕괴했는데, 악에 대해 충분한 성찰이 이뤄지지 않거나 심지어 적절한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다면 그 악은 극복될 수 없다. (158)
* 탈공산주의 사회에서 과거를 정리하는 분야에서 교회도 실패했다. 교회는 용성의 전문가로서 용서와 화해가 잘못을 단지 망각과 무시의 어둠으로 밀어 넣은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큰 비용이 드는 과정임을 보여줘야 했다. 한 번이라도 먼저 자기 선에서 부역했던 문제를 따져 보려는, 즉 자기 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 보려는 용기를 내지 못한 교회는 차츰 신뢰를 잃기 시작했고, 치유되지 않은 사회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헌신할 도덕적 권리를 상실했다. (159)
* 세계화의 중요한 도구는 우리 시대의 가장 값진 상품을 다루는 대중 매체였고 지금도 그렇다. 사람들은 텔레비변 뉴스 화면에서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진실로 여기고, 선호하는 방송국의 뉴스로 그 정보를 입수하면 대개 중요한 정보로 여기게 된다. 전자 매체는 늘 빵과 서커스, 즉 생존에 필요한 약간의 정보와 오락 산업의 산물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현실로 우리 시대의 신성한 게임인 스포츠 경기, 팝 콘서트, 정치인의 선거에 참여하도록 해 준다. 매체는 지구촌을 만들지 못했고, 촌을 촌으로 만드는 것, 이웃과 서로 함께하는 공간인 마을 광장도 공동의 교회도 뭐 하나 마음대로 만들 수 없었다. 기술이 모든 거리감을 없앴지만, 친밀감은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마르친 하이데거의 생각이 옳았음을 주었다. 기술이 일종의 거짓 친밀감을 만들어 냈다. (161)
* 우리 세계는 여러 방식으로 전부 연결되어 있지만 통일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호 연결성으로 사회적.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고,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163)
* 과도한 정보량을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없어서 생긱 얄팍하고 피상적인 지식과 피상적인 현상, 소셜 네트워크에서의 가상적 허위 친밀감이 위험 수위에 있다. (179)
*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대답하면 그게 올바른 답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올바름은 다른 많은 질문을 거쳐야 한다. (181)
* 신앙이란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과 이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인간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서로 스며드는 하나의 덕이다.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개방성이 인간의 개방성, 즉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능력을 만나게 된다. (182)
*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을 일깨위며 우리의 자유를 신뢰하시고 우리가 당신 선물에 믿음과 신뢰로 응답할 것이라고 믿으시면서 우리 믿음에 동행하신다. (183)
*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가리고 의문시하며, 그분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그늘에서 그리스도교 인본주의,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숨쉬기 힘들었다. (185)
* 신앙인은 익숙한 신앙 형태가 사라질 때, 하느님의 자기를 버렸다고 느낄 때 성금요일의 암흑 속을 지나간다. 하지만 이 어두운 밤을 버텨 내는 사람은 조만간 부활 아침의 빛, 신앙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 (192)
* 두려운 일이지만 우리의 신앙도 십자가의 어둠과 부활 전야의 고요와 침묵으로 내려가지 않으려고 한다면, 완전하지 않고 진정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을 것이다. (193)
* 물려받은 신앙이 내면화되지 못하고 그 사람의 내면의 감성적.지적 세계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세속화된 세계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될 위기에서 그 신앙은 존속하지 못한다.
* 신앙은 개인의 인생사에서 서서히 꼴을 갖추어 나간다. 그것은 역동적이고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신앙에서 하느님을 쉼 없이 찾기 위해서는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는 인간이 자기 뜻을 이루고자 하느님께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숨겨진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그분의 의지를 이해하려는 내적 침묵이 낳는 수단이다. (208)
* 신앙과 함께 따라다니며 신앙을 겸손하게 만드는 건전한 의심이란 하느님에 대한 의심이나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신앙인이 자기에게 건네신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한 의심이다. (209)
* 우리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견해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뢰에 대해 우리가 신뢰하는 응답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사랑으로 하는 응답이다. 신앙 자체는 특별한 실존적 체험으로서 세계와 삶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일종이다. 신앙과 사랑처럼 신앙과 이해 사이에도 해석학적 순환이 존재한다. (211)
* 우리 개인이 겪는 신앙의 위기는 역사의 위기와 일치하는데, 그건 우리 인생사가 역사의 흐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212)
* 신앙 공동체인 교회은 그림자 드리워진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여정에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213)
*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신앙이나 특정 그리스도교 그룹의 신앙에서 전체 교회의 신앙이 그리스도교 교리의 충만함이 존속한다. 하지만 개별 그리스도인이나 특정 그리스도교 그룹의 신앙과 지식은 언제나 인간적(역사.문화.언어.심리) 한계가 있어서 전체 교회의 신앙을 완전히 흡수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개별 신앙인과 개별적 신앙 학교, 영성 학교는 보완과 때에 따라서는 수정을 위해서 전체 교회와 교도 직무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코 인간 영혼의 전체 공간, 즉 프시케의 의식적.무의식적 영역 전체를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 (214-215)
* 자신의 신앙 여정이 참되고 전통에 충실한지, 또 자기 양심에서 하느님이 이끄시는 것에 충실한지를 겸손하게 묻는 것은 건전하다. 신앙은 교육과 환경의 영향으로 전해졌든, 개인 탐구의 결과로 받아들였든 상관없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은 어마어마하게 값진 선물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마음의 불안’도 마찬가리로 하느님의 값진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불안은 받아들였거나 확보한 어떤 특정한 형태의 신앙에 안주할 수 없게 하지만, 계속 나아가길 열망하고 탐색하게 한다. (216)
* 종교심리학은 신앙이란 우리의 통제를 완전히 넘어서 실재에 대한 실존적 원신뢰로서 인간 신존 전체에 스며들어 무의식 깊이 심리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217)
* 신앙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숙한 층에 개입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우리가 평소 종교적 실천에서 우리 신앙을 실현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보다 더 큰 하느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면, 그분은 우리가 마음이라는 은유로 묘사하는 우리 존재의 깊이와 열림을 무한히 넓히신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평소 우리의 종교적 실천으로 파악하고 퍼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무언가가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218)
* 오늘날 그리스도교 교회가 받는 가장 중요한 도전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전환이다. 교회의 중심 과제인 복음화가 영성의 생활 공간인 인간 삶과 문화의 심층적 차원에 스며들지 않으면 결코 새롭고 효과적일 수 없다. (221)
* 영성은 살아있는 신앙으로 지적 성찰과 신앙의 제도적 표현보다 앞선다. 영성이 그것들을 초월하고 이따금 위기의 순간에 그들을 되살리고 변형시킨다. (226)
* 우리가 종종 잊고 살지만 현대 문명에 깊이와 빛, 치유력을 부여할 수 있는 대단히 가치있는 영성의 원천들이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종교의 전통들, 또 세속 문화에도 분명히 있다. (232)
*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voluntas)의 이끌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대는 쾌락(voluptas)에 의해서도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 육체적 감각만 쾌락을 가지고 있고 정신은 그런 쾌락을 단념해야 하는 걸까? 사랑에 빠진 이를 보여 다오. 그는 내 말을 알 것이다. 열망으로 가득 차 있고, 굶주림과 광야를 순례하며 영원한 고향의 근원을 애타게 찾는 이를 내게 데려와 다오. 그런 사람은 내 말을 알 것이다. 하지만 내가 차가원 사람에게 말을 한다며,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233)
* 독일 루터교 신학자 에벨링은 하느님에 대한 자연과학적.객관주의적.객체지향적 언어를 경고한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 언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기 양심에서 나와야 하며, 개인적 투신이 뒤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234)
* 기도의 실천은 내 종교젹 견해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즉 기본 신뢰로서의 신앙에서 비롯된다. 누군가가 내 전체 신학의 지적 빈약함을 보여 주더라도, 하느님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모자란다고 지적한다고 해서 내가 기도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오히려 기도를 더 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있을 것이다. (243)
*신앙인들이 하느님이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그 절대적 신비에 우리가 참으로 마음을 열려면, 신에 대해서 우리가 전에 형성한 모든 생각을 우선 내려놓아야 한다. (245)
* 우리의 종교적 견해를 포함해 우리의 견해는 늘 우리의 에고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우리 프시케(영혼)의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그 좁고 얇은 층에서만 움직인다. 그러나 기도에서 표현되는 은총의 선물인 사랑.믿음.희망은 그 심층의 중심, 자기(Selbst)에서 나온다. (247)
* 신앙은 이성적 차원이 필요하다. 신학에서 합리성은 근본주의와 감성적 신앙주의에 대한 중요한 보호 장치다. 신앙이 하느님의 선물로서 우리 프시케의 모든 층에 스면든다면, 신앙의 주요한 부분은 프시케의 훨씬 더 심층적이고 중요한 부분, 즉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부분에서 살게 된다. (247)
* 교회와 신학의그 어떤 역사적 순간이나 역사적 형태에 관련하여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머물러라, 그대는 너무나 아름답구나"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교회는 역사 내내 여정에 있었지, 목적지에 도달한 적이 없다. (269)
*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회심의 4단계를 제시했다. 제1단계는 잘못된 것을 개선한다. 제2단계는 개선된 것에 순응하도록 한다. 즉, 예수님의 행동에 영감을 받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가야만 한다. 제3단계는 순응된 것을 확실히 한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고통의 어두운 밤을 걸어갈 힘을 얻는다. 제4단계는 확실히 한 것을 변형시킨다. 즉, 예수님 부활의 광명, 부활하신 분의 현존으로 만물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한다. (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