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고리우스의 부모(그레고리우스 1세, 논나)는 신심이 깊었고 교육열이 강하고 경제적 여유도 있어 장남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켰다. 그레고리우스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 이집트 알렉산드리라, 그리스 아네테에서 수학했다. 아테네에서는 친구 바실리우스와 합숙하고 함께 공부했다. 356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361년 말에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사제품을 받았다. 그후 폰투스로 가서 바실리우스와 함께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370년 바실리우스는 카파도키아의 대주교가 되었다. 372년 발렌스 황제가 카파도키아 지방을 양분하면서, 바실리우스는 북부 카파도키아의 대주교가 되었다. 바실리우스는 자기를 지지하는 주교들의 숫자를 늘리고자 372년 친구 그레고리우스를 남.북 카파도키아 경계에 있는 소읍 소시마의 주교로 임명했다. 이런 결정에 분개한 그레고리우스는 소시마에 부임하지 않았다.(“어제까지는 내가 사자였는데 오늘은 내가 원숭이 꼴이 되었구나.”) 374년 부모가 귀천하자,이사우리아 지방의 셀레우키아로 가서 은둔생활을 했다. 378년 아리우스 이단을 지지하던 발렌스 황제가 죽고, 379년 동로마 황제로 등극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380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면서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5월-7월)는 그레고리우스의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추인하고 그를 공의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사시마 주교로 임병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된 것은 위법이라는 논란이 일자, 공의회 주교들과 교우들 앞에서 고별사를 하고 나지안주스로 물러갔다. 383년 임사로 나지안주스 주교좌 일을 보살피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리안주스에서 칩거하다 390년 경에 귀천했다. 축일은 1월 2일이다.
그레고리우스의 비문: 오, 그리스도 임금님, 왜 저를 육신 그물에 가두셨나이까? 왜 저를 적의에 찬 삶에 내맡기셨나이까? 저는 매우 경건한 아버지와 편협하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간구로 햇빛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기도하여 얻은 어린 아들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저는 꿈에 환시를 보고 독신생활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룩하신 주인공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후에 자는 격랑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탐욕스런 인간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성직자들과 싸웠는데, 그들 가운데 친구는 없고 만나느니 불신이었습니다. 죄악의 소굴을 멀리하면서 나는 내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이게 고레고리우스의 삶입니다. 저의 앞날을 나를 지어내신 그리스도의 배려에 맡깁니다. 이 글을 비석에 새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