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에게 영원한 것을 향한 갈망이 없고 우리 삶과 우리 마음속에 광포하게 들끓고 있는 힘만 있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으로 되어버리겠는가.
* 시인은 기억의 천재다. 시인은 이루어진 것을 회상하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이루어진 것을 찬양하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소유물에서는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시인이 그가 찾는 것을 찾아냈을 때는 노래를 부르고 열변을 토하면서 문전에서 문전으로 헤매고 다니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영웅을 찬양하고 자기와 똑같이 영웅을 자랑하라고 요구한다.
* 이 세상에서 위대하였던 자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그들이 사랑한 대상의 위대성에 정비례하여 위대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 자는 자기 힘으로 위대해졌고, 남을 사랑한 자는 그 헌신 때문에 위대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한 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위대해졌다. 하느님과 싸운 자는 가장 위대했다.
* 애통하다는 것은 인간다운 일이자. 우는 자와 더불어 우는 것은 인간다운 일이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위대하다. 믿음이 있는 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더욱 축복받을 일이다. 아브라함이 부른 애가는 없다. 그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설움에 잠겨 하루하루를 손꼽아 세지 않았다.
*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항상 최선의 것을 기대하는 자는 삶에 속아서 노인이 되고, 항상 최악의 것을 각오아하고 있는 자는 젊어서 늙고 말지만, 믿는 자는 영원한 젊음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 주께서는 부조리한 것을 기적적으로 실현하셨다. 그런데 이제 주께서는 그것을 다시 무로 바꿔버리려고 하신다. 그것은 정녕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약속이 고지되었을 때 사라처럼 비웃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일테가 상실되었다. 70년의 충실한 기다림과 믿음이 충족된 잠시 동안의 기쁨.
* 아브라함은 이삭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아브라함 자신은 뒤에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이지만, 이삭이 죽음의 먹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하여 믿었다. 그는 부조리한 것을 믿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볼 셈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 자기 자식을 잃는 아버지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경우는 자식을 그의 손에서 빼앗은 자가 하느님, 전능하신 분, 불면하고 헤아일 수 없는 의지였다. 하느님의 손이 자식을 빼앗은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에게는 더욱 어려운 시험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삭의 운명은 칼을 쥔 아브라함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안한 듯이 좌우를 살펴보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기도로써 하늘에 호소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칼을 뽑았다.
* 공경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시여! 그 일이 있었던 그날로부터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에 대한 기억을 망각의 힘으로부터 탈취해 버릴 후세의 숭배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나라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포와 전율>, 쇠얀 키에르케고르/임춘갑, 도서출판 치우, 2011, 2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