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개인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고요함을 찾을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자신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깐이라도 감실 앞에서 모든 걱정을 다시 한 번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최소한의 고요함을 얻을 수 없을 때, 들어가서 피난할 방이 없을 때, 어쩔 수 없는 의무 때문에 단 한 시간도 침묵할 수 없을 때, 순식간에 자기 자신속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곁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주님은 거기 계시고,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 에디트 슈타인/이연행, 가톨릭출판사, 2020, 18)
☞ 마음이 산란하고 혼란스럽고,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을 때, 이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두라는 말입니다. 외적으로 쉬고 침묵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고 그 장소와 익숙해지고 친밀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장소에 가서 몸과 마음과 정신을 가라 앉혀야 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얻게 된 침묵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외적인 여러 여건때문에 그런 장소로 갈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이런 경우에 '내적침묵'을 하라고 권합니다.
혼란스런 상황에서 내적침묵으로 피하기 위해서는 평소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수련하는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울 때, 건성으로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점차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속에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힘들지 않은 일이지만, 자기 기도방법으로 만들기기 위한 수련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영이시며 인격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을 기억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나와 함께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적으로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는 그분의 침묵안에 머물게 됩니다. 침묵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혼란스런 시간으로부터 피해있는 이런 시간을 통해 우리가 기력을 회복하고, 예수님의 영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