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하고 말하였다. (마태 20, 9-11)
☞ 오전 아홉 시와 열두 시, 오후 세 시와 다섯 시에 인력시장에 나타난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그렇게 늦게 나타났을까? 하루 세 끼 밥먹고 살고 가족 부양하기 위해, 새벽 일찍 인력시장에 나와 기다려도 하루 일할 거리를 찾을까 말까하는 세상인데. 잠 잘 것 다 자고, 자기 할 일 다하고 열두 시나 세 시에 나와서 일하겠다고? 밤새 술 × 마시고 오후 늦게 부시시 일어나 푸석푸석한 얼굴로 인력시장에 나와 하루 먹을 양식을 벌겠다고? 그런 정신으로 이 각박한 세상을 살겠다는 ×들과 새벽 일찍 나와 한낮의 뜨거운 뙤약볕을 견뎌가며 하루 종일 일한 우리들이 같은 대우를 받는게, 말이 되냐고!
이렇게 불평하고 따지고 드는 사람에게는 늦게 나올 수 밖에 없었을 사람들의 절박한 상황을 고려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개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높고 거대한 벽에 맞딱뜨렸던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체험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자기보호본능으로만 작용했으리라. 이런 맥락에서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한 사람이나 해질녘에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다는 포도밭 주인에 관한 이야기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모두 알고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와 너 사이에 있는 차이와 거리감과 이질감과 간극. 이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는 물론이고, 우리와 너희, 기득권자와 어떻게든 자기 설 자리를 마련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후발 주자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이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처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반드시 옳다라고 여기지 않는 분이시다. 오히려, 이것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우리에게 선포하려고 했던 분이시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수님에 대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라고 말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어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 있는 높고 거대한 벽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런 벽 앞에 서 있고, 뛰어넘을 수 없는 깊고 깊은 계곡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 인간의 처지를 비참함이라고 말하고(필리 1,23), 이런 비참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제기한다(로마 7,24).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요지부동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 자기가 누리고 있는 편안함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편안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을 후려치고 마음을 흔들어 놓는 분이시다. 이런 충격적인 흔들림을 통해, 우리 삶에 있는 차이과 간극와 거리김과 이질감을 넘어 새로운 가치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게 하신다. 이것을 하늘나라라고 말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너와 나, 우리와 너희,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것들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혼재해 있는 이곳을 떠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오늘 24일을 '이주민과 난민'의 날로 지내고 있다. 뿌리가 뽑힌 사람들, 내쫒기고 몰린 사람들, 자기 삶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난 사람들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들이 몸으로 느끼며살 수 밖에 없는 이질감과 소외감과 낯섦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살아볼만한 곳이고, 이런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며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면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