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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일요일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 능동성에서 수동성으로 전환되는 싯점이었습니다. 능동적이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말입니다. 이루어간다는 말입니다. 밖으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 전까지 주님의 삶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말이 '능동성'입니다. 수동성이란 당하는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임입니다. 무력함입니다. 수동성의 대표는 고통입니다. 고통을 능동적으로 자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은 '당하는 것'입니다. 철저한 비움입니다.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뚯대로 하소서." 그 후 주님의 태도는 절대적인 수동성이었습니다.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받는 분이었습니다.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도움에 의탁하는 분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는 분이 아니라 벌거벗김을 당하셨습니다. 죄와 악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아니라 죽음을 당하신 분으로 되셨습니다. 완벽하고 절대적인 수동성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비워진 사람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비워진 곳에 모든 것들이 받아들여 집니다. 블랙홀처럼 모든 것이 받아들여집니다.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양과 음으로 표현합니다. 이 두가지 것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넘어가게 되고, 음이 극에 달했을 때 양으로 되어갑니다.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양상이지만, 다른 것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수동성을 향해 나가는 기간입니다. 완전히 비워진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에로 나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능동성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때는 언제였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나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탄절과 주님 공현대축일입니다. 이 두 축일이 일반적인 능동성이라 한다면, 주님의 능동적인 면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세례 때입니다. 주님 세례 때,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의 소리와 더불어 세례 후에 예수님의 적극적인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말로 주님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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